3년 만에 하게 된 고3 수업이라 1학기 때는 의욕을 가지고 모둠활동을 조금씩 하고 모방시 쓰기 같은 표현 활동도 했는데, 2학기가 되자 다시 차가운 입시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너희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다."라고 말하고, 수행평가를 최대한 빨리 마친 후 EBS 문제집을 무미건조하게 풀었다. 지필평가를 위한 진도를 빨리 나가야 아이들이 수능에 필요한 공부에 각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9월이 다가오자, 뭔가 변화를 주고 싶었다. 고3 2학기 수업이 몸은 편하지만, 마음은 갈수록 불편해지는 것이라서 잘못하면 효능감을 잃고 비관적으로 되기 쉽다. 그래서 요즘 유행하는 '원영적 사고'를 응용해서 긍정적 에너지를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전해주는 수업을 하기로 했다.
1학기에 비해 교실에서 만나는 아이들이 숫자 줄어들어서 '오히려 좋은' 점도 있다. 조금만 노력하면 아이들 모두를 집중시킬 수 있다. 그리고 9월 중순에 수시 접수가 끝나면 교실에서 다시 얼굴을 보기 힘든 아이가 많아서, "나에게 수업을 들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하면서 수업 참여를 압박할 수 있다. 다른 과목 공부를 하는 아이나 2학기 성적이 필요 없어서 핸드폰만 보고 있는 아이도 머리도 식힐 겸 몇 분 정도는 내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어서, 수업 초반을 잘 이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이들 입장에선 선생님이 진도 나가기 전에 하는 딴소리, 혹은 잔소리로 여길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말'이 아니라, 고3 2학기 수업도 즐거운 마음으로 준비해서 들어오는 '태도'이다. 그래서 수업을 몇 명이 듣는 가는 중요하지 않다. 말은 그냥 흘러가기 쉽지만, 태도는 시간이 지나도 비슷한 상황이 되면 몸이 기억해 내는 마법을 부릴 수 있다.
사실 내가 준비하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9월부터 시작하는 비문학 독해 수업용 PPT에 표지를 만들고, 몇 마디를 덧붙이는 것이 거의 전부이다. 며칠 전에는 <에스포지토의 주권과 면역>이라는 정치 철학 지문으로 수업했는데, 표지를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철학자 로베르토 에스포지토는 근대 주권을 일종의 면역 장치로 보았다.' 이런 문장으로 시작하는 비문학 지문을 읽으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여러분의 마음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철학? 윽, 어렵겠군. 에스포지토? 휴, 이 사람은 또 누구야? 근대 주권이 면역 장치라니... 와, 어렵겠다.' 아마 이러지 않을까요? 그런데 선생님도 이런 마음으로 수업을 준비하면 짜증 나고 힘들겠죠. 그래서 '민수적 사고'로 완전 럭키비키하게 수업을 준비해 봤어요.
'철학? 비문학 수업하며 평소에 읽기 힘든 철학을 접하니 좋군. 에스포지토? 처음 들어보는 철학자인데 검색해 봐야지. 와~ <사회 면역>이란 책도 쓰고, 코로나 이후에 더 유명해진 완전 핫한 분이네. 주권과 면역이 관계가 있다고? 신선하네. 언젠가 나의 교양을 뽐낼 수 있겠군.'
이런 말을 듣는 아이들의 표정은 오묘했지만, 몇 명이라도 속으로 '민수샘이 수업 준비하는 태도가 신선한데' 하고 생각했다면 그걸로 만족이다. 그리고 첫 문단을 같이 보면서,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라 글을 읽는 한 사람의 독자로서 내용을 이해하고 요약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이 수업을 통해서 '독서는 힘들지만 기분 좋은 일일 수 있다는 것'을 나중에라도 체험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과학 지문으로 수업할 때는 '모태문과 민수샘의 과학 독해법'의 최종판을 보여줄 예정이다. 과학기술 지문은 독해의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싶다. 객관식 문제를 풀기 위한 독해는 고역이기 때문에, 인문 계열 학과로 진학하거나 졸업 이후에 과학책을 읽을 일이 없을 것 같은 학생이라면 '럭키비키잖아. 마지막으로 과학 지문을 읽으니 오히려 좋아!'를 속으로 외쳐보라고 말하고 싶다.
'결정화 기술'에 관한 화학 지문을 가르칠 때는 PPT 표지에 '소금 결정' 사진을 커다랗게 넣어서 글의 화제를 알려주고, '결정이 생기는 꿀이 더 좋은 꿀일까?'라는 질문을 통해 관심을 유도하려고 한다. 이어서 어렵고 낯선 어휘부터 알기 쉽게 정리해서 머릿속에 집어넣거나 옆에 메모하면서 독해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수리과학적 사고 능력이 대한민국 하위 10%' 이내인 내가 과학 지문을 오로지 국어 독해법으로 읽고 이해하는 마음의 소리를 꺼내어 들려주려고 한다.
이렇게 생각을 초긍정적으로 바꾸려고 노력하니까, 모든 교사가 힘 빠지기 쉬운 고3 2학기 수업을 소재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역시 럭키비키하다고 믿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