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인천의 한 고등학교에서 초대해 주어 배움중심수업에 관한 연수를 하고 왔다. 교사 전문적 학습공동체를 맡고 있는 선생님께서 선물을 잔뜩 준비해서 전해주셨는데, 그중에 흰색 때밀이 수건도 있었다. 앗싸, 뜻밖의 득템이었다.ㅎㅎ
포장이 아까워서 만져만 보고 있는 이 선물을 꺼내 보니, 얼마 전 학교 도서관에서 읽은 책에서 건진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내가 만약 사랑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건 바로 너 때문일 거야."
작가 이름은 기억나는데, 책 제목이 떠오르지 않아 검색을 해봤다. '정이랑... 아니, 뭔가 잘못됐다.' SNL이 지배하고 있는 뇌의 한 부분 때문에 오류가 생겼지만, 바로 정여울 작가님으로 수정해서 검색하니 책을 찾을 수 있었다...
그 문장은 <공부할 권리 - 품위 있는 삶을 위한 인문학 선언>이란 책에서 건진 것이었다. 정여울 작가님이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 인용한 부분을 다시 읽어본다.
골드문트의 마지막을 지켜보며 가슴 아프게 속삭이던 나르치스의 명대사는 언제 다시 떠올려도 눈물겹습니다. "내가 만약 사랑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건 바로 너 때문일 거야." 독한 술과 미친 노래와 두서없는 넋두리를 나누며 숱한 밤을 지새워 준 내 친구에게 제가 전하고 싶은 말이기도 합니다. 저는 제 소중한 친구에게 이렇게 편지를 쓰고 싶습니다. 내가 만약 조금이라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면 그건 바로 너 때문일 거야. 내가 만일 행복이 무엇인지를 조금이라도 경험해 본 적이 있다면 그 또한 바로 네 덕분일 거야……
나르치스가 골드문트에게 전한 마지막 말에 담긴 '사랑'은 남녀 간의 뜨거운 사랑이 아닌 '우정'이었다. 그래서 정여울 님도 얼굴을 본지는 한참 되었지만, 몸의 세포 속에 각인처럼 남아 있는 소중한 친구들을 떠올린 것 같다. 나 역시 길고 길었던 대학 시절, 벗들의 사랑을 넘치게 받았다. 지나고 보니 말다툼하던 동기, 존경하던 선배, 질투하던 후배 모두 지랄맞던 20대를 함께 견뎌준 '정인(情人)'이었다.
교직에 들어와서도 선생님들에게 과분한 사랑을 받은 순간이 참 많았다. 나를 초대해 준 선생님이 흰 때밀이 수건을 수줍게 건네던 순간에도 동료애를 넘어 동포애, 인류애까지 느꼈다. 선물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볼펜 세트와 작은 노트, 그리고 내가 쓴 책도 연수에 참여한 선생님 숫자만큼 미리 구입해서 소박한 사인회까지 열 수 있게 해주셨다.
이처럼 환대를 받으니 행복 에너지가 폭발해서 정말 신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때 찍은 몇 장의 사진을 다시 보니까 이런 생각도 든다. 인생은 롱테이크가 연속되는 영화 같아서 지루하고 덧없어 보이지만, 사랑을 받을 때의 행복은 클로즈업으로 찍힌 몇 장면처럼 기억 깊숙한 곳에 새겨진다. 그리고 삶의 고비를 만날 때마다 번갈아 나타나 '더 열심히 살아봐. 힘을 내봐.' 속삭이며 살며시 등을 밀어준다.
인간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흔들리는 마음이 쌓이는 날이면, 인천에서 만난 선생님들의 환한 표정과 환대의 순간을 새하얀 수건처럼 꺼내서 마음의 때를 싹싹 밀어버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