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희랍어시간>은 하루에 10장 이상 읽기 힘들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눈보라에 갇혀 나아가기 힘들었다면, <희랍어시간>은 깜깜한 골목에 갇혀 맴도는 느낌이다. 직업병인지 책 제목을 자꾸 <희랍어수업>으로 적는 것도 문제다. (이 글을 쓰는 동안 3번이나 고쳤다.)
심호흡을 하고 20장 정도 읽은 날도 있지만, 다음 장을 넘길 수 없는 고통스러운 고백이 내 손가락을 붙들었다. 그런 매혹적이지만 슬픈 독서 끝에 다다른 116쪽에서, 책을 끝까지 읽지 않아도 좋을 만큼 떨리는 문장을 만났다.
넌 철학을 하기엔 너무 문학적이야, 라고 너는 이따금 나에게 충고했지. 네가 사유를 통해 다다르고자 하는 곳은 일종의 문학적 고양 상태일 뿐이지 않니, 라고.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에게 독일에서 만난 친구가 한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내가 스스로에게 수없이 되뇌었던 말과 비슷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넌 교사를 하기엔 너무 문학적이야.'라고 자책하고 좌절했던 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때론 원칙 없고, 권위 없고, 가식적인 교사였던 나에게 내가 내린 판결이었다.
한강 작가는 이어지는 남자의 독백을 통해 '문학적 고양 상태'를 멋지게, 완벽하게 말 그대로 형상화한다. '문학은 독자의 삶을 정서적, 미적으로 고양한다'라는 명제를 이보다 생생하게 구체적으로 서술한 표현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문학 텍스트를 읽는 시간을 견딜 수 없었어. 감각과 이미지, 감정과 사유가 허술하게 서로서로의 손에 깍지를 낀 채 흔들리는 그 세계를, 결코 신뢰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나는 어김없이 그 세계의 것들에 매혹되었지. 이를테면 아리스토텔레스를 강의하던 보르샤트 선생이 잠재태에 대해 설명하며 앞으로 내 머리는 하얗게 셀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죠. 지금 눈이 내리고 있지 않지만, 겨울이 되면 적어도 한번 눈이 올 것입니다' 라고 말했을 때 내가 감동한 것은, 오직 그 중첩된 이미지의 아름다움 때문이었어. 강의실에 앉은 젊은 우리들의 머리칼이, 키 큰 보르샤트 선생의 머리칼이 갑자기 서리처럼 희어지며 눈발이 흩날리던 그 순간의 환상을 잊을 수 없어.
소설 속 남자가 감동한 순간, 상상하던 환상을 고스란히 내 것처럼 느낄 수 있었다. 반세기 넘게 살아오는 동안 내가 줄곧 다다르고자 한 곳도 문학적 고양 상태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이 거친 세상을 살기엔 너무나 문학적'이었던 거다. 나의 대학 시절과 교직 생활에서도 서로 다른 감정과 사유가 허술하게 손에 깍지를 끼고 나를 흔들어댔다. 참으로 문학적으로, 애매하게...
117쪽에서 다시 멈춘다. 다음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내 안으로 들어간다. 한강의 소설은 그래서 '산티아고 순례길'과 비슷하다. 내 몸은 길을 걷고 있는데 내 정신은 과거, 현재, 미래를 헤치고 다닌다. 노벨 문학상을 그냥 받은 것이 아니다.
고등학교 3학년 늦가을에 담임 선생님은 내게 물었다. "너는 왜 하필 남들이 굶는과라고 하는 국문과에 가고 싶니?" 하고. 나는 문학을 전공하고 싶은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고 싶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강 작가도 이제 갓 국문과에 입학해서 선배들에게 들볶이고 있던 때라 나를 구원할 수 없다. 그리고 <희랍어시간>에서 묘사된 것처럼 문학의 본질을 멋지게 묘사한 구절이 그때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대신에 나는 "넥타이 매고 양복 입고 책상 앞에서 서류와 씨름하는 회사원은 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럼 영문학과나 다른 외국어 전공을 택하라고 담임 선생님은 타협안을 제시했다. 나는 기자나 작가가 되고 싶은 마음도 있어서 국문학과에 가고 싶다고 처음으로 주장이란 걸 해봤다.
어찌 됐든 문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지금은 '넥타이, 양복, 서류'로 무장한 이들이 우리나라 경제를 발전시킨 주축 중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때는 그것들의 이미지가 '칙칙함, 뻔함, 지겨움'과 일치했다. 문학의 이미지는 그 맞은편 밝은 햇살이 드는 언덕에서 일렁이고 있었지만, 정확하게 내 언어로 말할 수 없었다. 다시 긴 시간이 흘러 <희랍어시간>을 읽게 되었고, 그 시절 나를 문학으로 이끌었던 이미지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그것은 '아름다움'이었다.
나는 아름다운 삶을 살고 싶었고, 아름답지 않은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을 견디기 힘들었다. 문학 속엔 비열하고 비굴하고 비참한 인물이 많지만, 아름다운 사람들의 모습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내가 현실에서 발견한 아름다운 모습과도 닮아 있었다. 그때의 나는 문학 작품을 통해 아름다운 삶을 만나고 싶었고, 그러한 삶을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이 시작된 곳은 어디였을까? 한강의 <희랍어시간>에도 자주 등장하는 서울 강북의 '수유리', 그곳이었다. 반가웠다. 한강 작가처럼 나도 수유리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 동네에서 세례 받은 감각과 이미지, 감정과 사유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꼬마였던 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 '<희랍어수업>, 아니 <희랍어시간> 두 번째 수유리 이야기'는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