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킨 사람도, 응원하는 이도 없지만 '한강 작가의 소설 모두 읽기'를 무슨 국가적 사업처럼 열심히 하고 있다. 그러면서 가끔 찾아보는 한강 작가의 영상은 보물창고 같은 존재다. 작가의 말을 통해 작품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고, 창작의 고통과 환희가 빛과 어둠처럼 교차하는 작가의 삶을 조금이라도 체험할 수 있다.
최근에 읽은 <희랍어시간>은 내게는 '문학시간'처럼 다가왔다. 문학이 무엇이길래, 한 인간이 자신의 청춘을 오롯이 바치게 하는가. 그가 구토와 악몽을 참으며 쓴 글을 독자들은 왜 그렇게 찾아 읽으며 그 고통을 감내하는가.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엿볼 수 있는 실마리가 지금은 없는 동네, 수유리에 묻혀 있다. 2019년, 한강 작가와 독자의 만남 영상에서 한강 작가를 문학으로 이끈 수유리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독자의 질문 : 다양한 작품에서 수유리 언덕배기 집이 계속 나오더라고요. 소설이나 시집에서는 외롭고 고통을 배웠던 곳이라고 얘기하기도 하시고, 산문집에서는 약수터가 있던 정겹고 그리운 동네라고 하셨는데, 작가님에게 수유리는 어떤 곳인지,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알고 싶습니다.
한강 작가의 답변 : 제가 수유리로 이사한 게 10살, 11살 때인데요. 그 집에 갈 때까지 이사를 굉장히 많이 다녔어요. 저희 집이 가난해서 제가 초등학교를 5개를 다녔거든요. 계속 전학 가고, 전학 가고. 새로 친구 사귀고, 사귀고. 너무 힘들었어요. 그래서 그때는 지금보다 외향적이었어요. 살아남아야 하니까. 수유리 집에서 20대 후반까지 살았으니까 저에게는 집이라고 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공간이고요. 좀 애틋하죠, 그 동네가. 저에겐 언젠가 돌아가고 싶은 곳인데, 지금은 많이 변했겠죠.
우리가 유튜브를 여는 것도, 책을 집어 드는 것도 다 '연결되고 싶다'는 마음이 손을 움직인 것이 아닐까. 인간은 다른 존재와 연결되지 않으면, 서서히 방전되어 쇠붙이처럼 차가워진다. 내가 지금은 사라진 지명, 실루엣만 남아있는 수유리에 감전되듯 반응한 것도 유년 시절의 나와 연결되고 싶은 바람이 이끈 것이다. 한강 작가가 애틋함으로 표현한 그 마음이다. 자기를 둘러싼 세상의 아름다움에 그 어떤 불순물 없이 매혹되던 그 순간. 그 찰나가 문학이었고 예술이었고 삶의 목적 그 자체였다.
<희랍어시간>에서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 주인공은 독일에 있는 여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랑을 잃고, 친구를 잃고 가족과 멀리 떨어져 희랍어를 가르치며 살아가는 그에게 수유리는 아름다운 공간으로 남아 있다.
수유리의 우리 집 기억하니.
방이 네 개나 되는, 당시로선 꽤 넓은 편이었지만 외풍이 심해 겨울을 나기 힘든 빌라였지. 동향이라 더 춥다고 어머니는 불평하시곤 했지만 난 그게 더 좋았어. 새벽에 깨어서 거실로 나오면 모든 가구들이 푸른 헝겊에 싸여 있는 것 같았지. 파르스름한 실들이 쉴 새 없이 뽑아져 나와 싸늘한 공기를 그득 채우는 것 같은 광경을, 내복 바람으로 넋 없이 바라보며 서 있곤 했어. 마치 황홀한 환각 같던 그 광경이 약한 시력 때문이었다는 걸 그땐 알지 못했지.
어느 겨울날 새벽에 깨어난 어린 한강도 이처럼 아름다운 푸른빛을 '넋 없이' 바라봤을 것이다. 넋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몸이 먼저 반응하는 원초적인 아름다움에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유년기에는 이런 순간이 참 많았다. 나와 한강 작가가 살았던 수유리 집과 골목, 학교 가는 길에 있던 오밀조밀한 가게에도 푸른빛, 노란빛, 분홍빛이 넘쳐났던 시절이었다.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나오는 쌍문동, 그 동네처럼 말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나와 비슷한 세대는 고등학생이 되면서, 요즘 아이들은 열 살도 되기 전에 학원이란 상자 속에 갇히면서 '아름다운 유년의 빛'을 잃어버린다. 푸른 헝겊에 싸여 있는 것 같은, 파르스름한 실들이 춤추는 것 같은 아침 햇살의 찬란함을 보지 못한다. 대신 핸드폰 화면만을 코를 박고 쳐다보고만 있다. 블루라이트가 차단되어 편안하게 볼 수 있다는 주술을 믿으면서.
나는 열 살이 되던 해에 수유리를 떠났다. 한강 작가가 이사 오고 반년쯤 지난 때였다. 그 동네에서 우연히 지나쳤을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수유리 집을 떠올리면 나 역시 애틋함이 돋는다. 애틋함에는 페이스트리 빵처럼 속 안에 여러 겹이 있다. 내 유년 시절을 떠올리면 섭섭함이나 안타까움보다 다른 두꺼운 감정의 층이 보인다.
나는 <희랍어시간>에 묘사된 것보다 더 빛이 들지 않는 집에 살았다. 정확히 말하면 양옥집 1층 옆에 방 두 개와 부엌이 딸린 셋방이었다. (응팔에서 덕선이네와 비슷한 구조였다) 가장 선명한 기억은 '화장실로 가는 길'이다. 부엌과 연결된 문을 열고 나가서, 꼬마였던 내가 열 걸음쯤 다다닥 달려가면 대문 옆에 딸린 화장실(변소라고 부르던 곳)이 있었다.
금방 짐작할 수 있겠지만, 그곳에 가장 가기 싫고 무서웠던 때는 추운 겨울밤이었다. 내가 투정을 부렸는지 조용히 갔다 왔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한 줄기 불빛은 아직 망막 속에 남아있다. 비나 눈이 오는 밤이라면 더 두려웠을 화장실 원정길이었지만, 내 뒤에는 나를 비추던 불빛이 있었다.
내 뒤에서 플래시 불빛을 비춰주던 그 손을 잊지 못한다. 추우니까 빨랑 나와, 말하던 건 누나였을까. 민수야, 계속 부르지 마라. 안 가고 여기 있다,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속삭이던 건 엄마였을까, 아빠였을까. 그 불빛과 목소리는 떠오르는데, 신기하게도 불쾌한 감각은 남아있지 않다.
깜깜한 밤, 집 밖에 있던 화장실로 뛰어가는 길을 도전으로, 모험으로 만들어주었던 사람들. 내가 한 손으로 코를 잡고 앉아 노래를 부르면, 화장실 밖에서 같이 불러주던 가족들. 나를 둘러싼 세계가 아름답게 빛나던 수유리의 그 겨울밤이 내 문학의 시작이었을까. 문학과 사랑에 빠지게 될 운명이 별똥별처럼 스쳐가던 밤이었을까…
- 사골국처럼 변하고 있는 '<희랍어시간> 세 번째 이야기'는 다음 글로 이어집니다. 초대 손님(?)은 북한산 인수봉과 백운대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