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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 수능특강 문학, <강도몽유록>을 가르치다가

by 글쓰는 민수샘

슬픔도 없이

강도몽유록을 가르치려다 주춤했다.

노여움도 없이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되자

자결한 여인들이 많았다고 전하려다가 멈칫했다.


- 이들 모두는 놀라고 두려워 허둥지둥하는 모습에 서글픈 기운을 띠고 있었다. 연약한 머리가 한 길 남짓한 밧줄에 묶이거나 한 자쯤 되는 칼날에 붙어 있는 이도 있고, 으스러진 뼈에서 피가 흐르는 이도 있고, 머리가 모두 부서진 이도 있고…


그날의 처참한 모습 그대로

영혼이 되어 모인 여인들은 이렇게 말한다.


- 나라님이 피란했으니 그 처참함이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나라의 수치가 이처럼 컸지만 충성스러운 신하와 의로운 신하는 만에 하나도 없었습니다.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라는

어느 시인의 말처럼

슬픔의 반대말은 기쁨이 아니라 잊혀짐이 아닐까.

노여움의 반대말은 용서가 아니라 가벼움이 아닐까.

강화도에서 죽어간 여인들의 조국도

또 다른 전쟁과 내란과 범죄로 죽어간 이들의 조국도

지금 우리가 사랑하는 조국인 것을.


나라님과 신하들이 자기 국민을 죽이려 했던

그날을 어찌 가볍게 잊을 수 있겠는가.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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