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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나로 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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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괴왕 Dec 02. 2019

같이 죽기로

지난주부터 11월 마지막 날까지 나는 눈물로 매일 밤을 보냈다. 울다가 씻지도 않고 자는 바람에 눈에 다래끼도 났다. 휴지로 눈을 하도 비벼대서 다래끼 때문에 눈이 아픈 줄도 몰랐다.


지난 일주일간 죽고 싶다는 이야기를 수천 번을 더했다. 송에게 나는 11월 마지막 날에 죽어버릴 예정이라  2019년 12월의 나는 없을 거라고 말했다. 구라였다. 나는 살고 싶다. 병에 걸리기도 싫고 재수 없는 사고를 당하기도 싫다. 불안하지 않고 상처 받지 않고 나를 미워하지 않는 아주 건강한 상태로 씩씩하게 살고 싶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아니라서 그냥 내가 잠드는 사이에 지구가, 인류의 시간이, 내 역사가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싹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누구도 속상하지 않도록 말이다.


나는 너무 분통하고 억울해서 세상 모든 사람이 미웠다. 모든 모임을 취소하고 장과의 약속도 취소했다. 죽고 싶다고 열심히 퍼부어놓고 장의 위로에 답장하지 않았다. 장의 몇 주가 지나버린 생일을 근사하게 챙겨주고 싶었는데 내가 못나서 그게 다 도루묵이 됐다. 장은 지난달에 내가 좋아하는 기린이 그려진 폰케이스도 주고 꽃다발도 한아름 안겨줬는데... 나는 꽃을 좋아하지 않는데도 그날 꽃다발을 받은 게 너무 기분이 좋아서, 내 생일을 꽃을 받은 그날로 하기로 했다. 꽃은 집에 아무렇게나 두었는데도 혼자 예쁘게 말라있다. 고마운 장에게 내가 속상하다고 약속을 멋대로 취소해버리는 어리석은 짓을 했다.


신기하게 12월 1일이 되니 눈물이 싹 말라서 장에게 약속을 다시 잡자고 연락을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장이 죽고 싶다는 소리를 한다. 나더러 죽을 거면 같이 죽자고 한다. 오래전부터 장을 괴롭히던 상사가 아주 애를 말려 죽이려는 듯이 장의 마음을 꼬집어댄다. 장은 지난번에도 이 이야기를 하면서 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장이 이렇게 괴로워하는데 나는 친구가 돼서 '그깟 회사 때려치우자'는 소리도 시원하게 못했다. 왜냐면 밥벌이를 못하는 사람의 설움은 또 다른 차원으로 사람을 죽고 싶게 만들기 때문이다. 농담이랍시고 다음 정권 때까지만 버티라는 말이나 했다. 장은 내게 위로되는 말을 못 해줘서 미안하다 그랬는데, 그 말이 꼭 내 마음과 같아서 나는 또 눈물을 훔쳤다.


죽고 싶은 건 나랑 장만이 아니고 장의 아는 언니도 그렇단다. 그 언니는 내가 요즘 가장 부러워하는 손재주가 뛰어난 사람이다. 안타까운 가정사가 있지만 씩씩하게 잘 사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챙겨야 할 가족들이 남아있어 죽지 못해한다고 했다. 그 언니의 세상은 정말 지옥일 텐데, 그래도 살아달라고 장은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 언니를 잘 모르지만 그 언니가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기도했다. 우리는 죽고 싶어도 남은 가족들이 먼저 간 우리 때문에 제대로 살지 못할까 봐 죽지 못한다. 사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는데 죽는 것도 맘대로 죽지 못한다.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그냥 행복하면 좋겠다고 빌뿐이다.


우리는 진짜 진짜 죽고 싶으면 서로 꼭 말해주기로 했다. 같이 가장 평안한 방법을 찾아서 같이 죽기로 했다. 죽기 전에, 장은 회사 인트라넷에 자신의 죽음에는 못된 상사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폭로하기로 했고 나는 내 살생부에 적힌 놈 하나 목을 따기로 했다. 그러고는 우리 행위가 법적으로 문제가 되기 전에 얼른 죽어버리기로 했다. 장은 상사 새끼 저거 언제든지 X되게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내일을 살기로 했다. 나도 같은 마음으로 12월을 맞기로 했다. 뭔가 조금 후련해진 기분이 들었다. 오랜만에 좋아하는 검정치마나 자우림 노래를 빵빵하게 틀어놓고 열심히 흥얼거렸다. 그러다 보니 갑자기 미뤄뒀던 할 일이 생각나서 책상 앞에 앉았다. 월요일이다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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