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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괴왕 Jan 10. 2020

나의 취향

나는 왜 뭘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할까 - 답은 아직


나는 안 그런 척 하지만 남의눈을 굉장히 신경 쓰는 편이다. 모든 것에 그런 건 아니고 몇 가지 부분에서 특히 그런데 '취향' 문제도 그중 하나다.


 나는 누구에게 '나는 XX를 좋아해'라는 말을 쉽게 잘 못한다. '좋다'는 것의 기준이 뭔지, 그 기준에 나의 XX에 대한 감정이 부합하는지 확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애매한 감정을 '뿅뿅하다'라고 칭하겠다. 예를 들어.. 나는 기린을 뿅뿅한다. 휴대폰 배경 사진도 기린, 휴대폰 케이스도 기린, 노트북 배경도 기린, 필통도 기린이다. 나는 기린이 귀엽다. 꾸미는 것에 관심 없는 내가 뭔갈 꾸미고 싶을 때는 항상 '기린 무늬', '기린 패치' 등을 찾아보곤 한다. 


그렇다면 내가 기린을 좋아하는 걸까? 어느 정도 애정은 있다. 가끔 고화질 기린 사진을 보며 흐뭇해하고 기린 영상을 찾아보며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하지만.. 좋아한다고 말하기엔 나는 기린의 생물학적 명칭이나 기린의 종/속에 대한 것, 현존하는 기린의 종류와 특징, 먹이, 짝짓기 철, 기린이 마주한 생태적 위기 등등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 나는 그냥 그것의 외양만 좋아하는 것일 뿐 기린의 모든 속성을 포함한 존재 자체를 진심으로 애정 하진 않는 거다. 게다가 나는 내가 어쩌다 기린을 좋아하게 됐는지 그 기원을 기억하지도 못한다. 누가 날 좋아한다고 말하는데 나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고 내가 왜 좋은지 설명도 못한다면 나는 'ㅡㅡ?'라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아마 기린도 내가 지 좋아한다고 하면 같은 표정을 지을 것..


이런 것들이 부끄러워서 나는 누가 '너 기린 좋아하는구나'라고 먼저 말해줄 때까지 기린 좋아한다는 말을 잘 하진 않는다. 


그니까 나는... 뭔가를 좋아한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한 앎과 물질적, 시간적 투자가 충분해야 한다고 보는 것 같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좋아함'의 자격이고 나는 대부분의 XX에 그걸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으니.. 제대로 된 취향이라는 게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덕후'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대단하고 존경스럽다.

 

사실 사람들은 뭘 좋아한다는 말에 이 정도로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는다. 왜냐면 타인이 자신의 취향에 대고 '야 씨 너는 진정으로 XX을 좋아하지 않잖아!'하고 고나리질을 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나는.. 좀 자의식이 과잉인 것 같다. 사람들은 내가 뭘 좋아하든 관심도 없는데 나 혼자 있지도 않은 눈치를 보며 취향을 갖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올해 목표 중 하나는 나만의 취향을 갖는 것,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지금 생각나는 나의 취향 몇 가지를 나열해 본다면..


1. 나는 초록색을 (아마도) 좋아한다. 물건을 고를 때 가장 먼저 초록색 옵션을 살핀다. 다만 모든 초록색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노란색이 많이 섞인 연두색이나 형광색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파랑이 섞인 청록이나 명도가 낮은 쑥색 등을 좋아한다. 무조건 초록색을 고르는 것도 아니다. 다른 색이 더 이쁘면 다른 색을 고른다.


2. 나는 돼지국밥을 (아마도) 좋아한다. 국밥집을 딱히 가리진 않는다. 국물 농도나 맛을 까다롭게 따지지도 않는다. 몇 달 전에 광화문에서 유명하다는 돼지국밥 집을 찾았다가 내 입맛을 몇 가지 더 알아냈다. 나는 국밥에선 어느 정도 쿰쿰한 예스러운 누린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울에서는 누린내가 나지 않을수록 맛집이라고 보는 모양인데, 그래서 광화문 국밥집을 찾았을 때 실망이 매우 컸다. 누린내가 너무 나지 않고 깔끔해서 닭 육수 같은 맛이 났다. 나 같은 사람들이 있었는지 닭 육수를 쓰지 않는다고 써붙였는데 오직 돼지를 조리했는데 돼지 맛이 안 나고 닭맛이 나는 게 뭐가 좋을 일인가 한참을 생각했다.


3. 나는 입맛이 까다롭진 않지만 까다로운 편이다. 보통은 주는 대로 잘 먹고 남기지도 않는다. 그렇지만 맛있게 먹고도 두 번 다시 찾지 않는 음식이 많다. 삼삼하고 심심하고 재료 본연의 맛이 살아있는 음식을 좋아한다. 소면은 별로 좋아하지 않고 두꺼운 면을 좋아한다. 파스타는 엄청 좋아하는 편. 불규칙하게 썬 손칼국수도 좋다. 음식은 맛도 맛이지만 영양 밸런스를 은근히 신경 쓰는 편이다. 영양학적으로 균형 있는 거 말고 내가 좋아하는 비율이 있다. 탄단지는 1:1:1인 게 기분 좋고 채소는 많을수록 신난다. 채소 좋아한다. 유제품 좋아한다. 간장 싫어하는데 입도 안대는 건 아니고 필요할 땐 먹는다. 근데 간장+설탕으로 조린 건 싫다. 데리야끼 싫어한다. 장아찌는 괜찮다. 


4. 패션에 관심이 ㅈㅓㄴㅎㅕ 없지만 로엠.. 미쏘.. 같은 로맨틱 오피스룩 같은 건 별로 안 좋아한다. 어릴 때 엄마랑 구제시장을 많이 다녀서 그런가 새 옷에 별로 관심이 없다. 구제시장에서 싸게 얻어걸리는 옷이 좋다. 사연 있어 보이는 빈티지스러움.. 그리고 새로운 공장 생산품을 소비함으로써 환경오염에 일조했다는 죄책감이 들지 않는 것도 좋다. 가끔씩 명품 패션쇼나 룩북을 찾아보긴 한다. 진짜 그냥 본다.


5. 캐릭터 상품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것도 엄마 영향인 것 같다. 예전에 만화영화 캐릭터 신발 사달라 그러면 '얄구져서 안돼'라고 했는데 나는 '얄구진' 캐릭터 상품을 싫어하는 어른으로 컸다. 엄마가 딱 한 번 사준 리리카였나.. 체리였나.. 신발은 아직도 기억난다. 


6. 1+1을 싫어한다. 순간의 이득에 혹해 한 가지 제품을 질리도록 쓰게 만든다. 청소용 락스 말고는 1+1을 선호하지 않는다. 하나만 살게 반으로 깎아주면 안 될까?  


7. 검정치마, 레이먼드 카버, 박완서(가나다 순)를 좋아한다.. 고 말하기엔 좀 그렇다. 왜냐면 이들의 작품을 모두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중 몇 개만 좋아하니까. 그래도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다.


8. 이성... 외모는 잘 모르겠다. 잘생기면 다 아닌가ㅎ... 우락부락한 것보다 슬림하고 예민해 보이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긴 하다. 눈빛이 좋으면 좋다. 예를 들어 양조위.. 그리고 자기 일을 사랑하고 잘하는 사람도 좋다. 요즘 정경호, 남궁민을 보면 '흠흠...ㅎ'하게 되는데 이들의 필모그래피가 내 맘에 들기 때문이다. 작품 보는 눈이 있다는 건 자기 일을 잘한다는 거니까..ㅎ 다정하고 자상한 게 좋다. 노래 취향이 나랑 맞는 것도 중요하다. K-발라드나 힙합 좋아하면 싫을 듯.. 브리티시 락 같은 거 좋아하는 게 좋다. 그리고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말하진 않지만 누가 봐도 페미니스트였으면 좋겠음. 글씨도 예뻤으면 좋겠음. 글을 좋아하면 좋겠음. 영화도 좋아하면 좋겠음. 키는 183 미만이면 좋겠음.

 

9. 초코맛, 오렌지맛을 선호하지 않는다. 초코는 정말 팜유 함량 높은 싸구려 맛이 날 때마다 화가 난다. 초콜릿이 진득하게 함유된 진짜 춰퀄릿 맛이 아니면 웬만하면 안전한 바닐라로 간다. 오렌지맛은 먹다보면 머리가 아프다.


그나저나 나는 어쩌다 이런 사람이 돼버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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