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몇 번의 취업 실패와 고민을 뒤로 무기력한 나날들이 이어졌다. 능력에 대해 스스로를 의심하고, 불행한 환경을 탓하며 집에서 쉬는 날이 늘어가고 있었다. 하루는 가만히 죽은 듯이 방안에 누워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도 있었다. 이러다가 정말 바닥 장판과 하나가 되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면 하고 생각했다. 우울한 생각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고, 그런 생각을 견딜 수 없어 술을 아주 많이 마시고 돌아온 어떤 날이었다.
벨소리가 울렸고, 쌀쌀한 바람이 방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술김에 창문을 열고 잔 것이 화근이었다. 저장되어있지 않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전화보다 당장 뒤집어질 것 같은 속이 문제였다. 술과 잠에 취해서 전화를 받았을 때, 단정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처음 들어보는 목소리에, 당연히 대출이나 보험 전화겠거니 싶어 짜증이 밀려 올라올 때 익숙한 단어가 들렸다. 내 이름이었다.
" 여기는 동물의료센터인데, 혹시 주무시고 계신 중이셨나 봐요. "
동물의료센터. 감조차 잡을 수 없는 곳에서 전화가 왔었다. 짧은 몇 초 안에 도대체 무슨 연관으로 내게 전화를 했는가 싶어 온 기억이 헤집었다. 동물과는 거리가 먼 내 인생에 대체 무슨 연유로 내게 전화를 건단 말인가. 이름을 아는 걸 보면 분명 관련이 있을 텐데, 영문을 모르는 통화 속에서 한 가지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단어가 있었다. 바로 잡코리아였다.
며칠 전, 아무 생각 없이 막연한 생각으로 이곳저곳에 이력서를 넣었다. 어느 기업에 지원을 했는지, 무슨 조건이 있는지조차 알 수 없지만 막연한 마음으로 집어넣은 이력서가 동물의료센터까지 흘러간 것이다. 급하게 정신을 가다듬고 인사를 드렸다. 입을 열 때마다 술냄새가 나서, 참을 수 없었지만 이대로 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안녕하세요, 아 제가 어제 일을 좀 늦게까지 하느라 ... "
'숙취에 찌들어서요'라고 대답할 수 없었기에 급하게 이리저리 둘러댔다. 누가 들어도 방금 일어난 듯한 목소리로 이런저런 말을 뱉었다. 사실 첫 통화는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한 건, 연봉과 계약기간, 그리고 나의 포트폴리오가 마음에 들었다는 이야기였다. 오후에 다시 통화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통화가 끝나고 다시 잠에 들었다. 아주 잠깐 꿈을 꿨었던 것 같기도 한데, 무슨 꿈이었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았다.
오후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잠에서 깼고, 잠깐 꿨던 꿈 때문인가 싶어 나는 한참 동안이나 침대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냥 멍하니 누워서 아침에 있었던 일이 사실인가를 천천히 되짚어 볼 뿐이었다. 핸드폰의 메일함을 살펴보니 보내주신 기획안이 눈앞을 가득 채웠다. 꿈이 아니구나.
" 반려동물 키워보셨어요? "
쓰린 속이 잠잠해지고, 벨소리가 다시 울렸다. 오전과는 다르게 아주 긴장한 채로 전화를 받았다. 가벼운 안부 뒤로, 첫 질문은 반려동물을 키워보았냐는 질문이었다. 대답은 '아니요'였다.
나는 반려동물을 키워보지 못했다. 몇 번 탁묘를 해보긴 했지만,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진 않다. 특히, 고양이는 털 알레르기 때문에 약을 먹지 않으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했다. 이전에 아주 오래 일했던 가게에서 고양이를 키웠던 적이 있다. 길가에 버려진 아이를 점장님이 데려와서 키웠는데, 틈만 나면 신경전을 벌였다. 귀여웠지만 괴로웠다. 반려동물에 관한 기억은 이 정도가 전부였다. 개든, 고양이든, 햄스터든, 물고기든 무엇 하나 키웠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반려동물에 대한 경험 없이 동물의료센터에 일하게 된다니, 생각만 해도 어이가 없어 당연히 떨어지게 되겠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기약 없는 기다림을 하게 되겠지 싶었다. 하나, 원장님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변하지 않은 조곤 한 어투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떤 영상을 원하는지, 또 우리가 기획한 콘텐츠는 어떤 것인지 섬세하고 열정 있는 말로 꽤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마 이때쯤에 처음으로 '입사해도 괜찮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 그럼 입사는 언제부터 가능할까요? "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입사를 확정 지을만한 통화를 했다. 수도 없이 고민을 하고, 꽤나 끙끙대며 걱정을 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이곳에 입사해도 괜찮겠다는 확정을 지었다. 내가 가진 포트폴리오의 결을 이해해주고, 제작자에 대한 입장을 존중해주는 태도가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
그럼에도 끝없는 아이러니는 나를 괴롭혔다. 동물이라니, 살면서 단 한 번도 생명이라는 걸 제 손으로 가꾸어본 적 없는 사람이 동물의료센터라니.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었다. 동시에, 대학교와 고향을 떠나야 하는 심란함과 이때다 싶어 온 오래전에 면접을 본 신문사의 최종 면접 전화는 내 마음을 한참 동안 뒤집어 놓았다. 몇 날 며칠 마음이 온통 뒤숭숭해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때도 꿈을 꿨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 12월 7일에 뵙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
그렇게 나는 동물병원 프로듀서가 되었다. 사실 프로듀서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그냥 내가 그렇게 붙여 이름을 부르기로 했다. 이제 갓 사회로 발을 뗀 나를 그 누구도 프로듀서라고 불러주지 않겠지만, 나는 나를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나는 의료센터에서 동물들과 병원에 관한 이런저런 영상을 만드는 사람이 되었다. 단 한 번도, 동물을 키워본 적은 없지만 동물에 대해 누구보다 해박한 지식을 가져야 할 사람이 되었다.
세상만사 웃기고 어이없는 일이 많다지만, 내 인생에 중요한 결정이 이렇게 순식간에 날 줄은 몰랐다. 취업 때문에 몇 달을 끙끙대고, 잠도 자지 못해 늘 퀭한 눈으로 외주를 처리하고, 굳어가는 머리통은 이대로 쓰레기가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보기 좋게 취업해버렸다.
그래서, 나는 글로 남기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처음으로 입사하게 될 직장에서 어떤 일이 생길지 너무도 궁금하고,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 건지 한 치 앞도 알 수 없기 때문에 기록하기로 했다. 동물의료센터에서는 무슨 일을 하는지, 그리고 프로듀서라고 불리는 제작자들이 무슨 일을 하며 살아가는지 적어도 궁금한 사람들이 한 번쯤 들쑤셔 볼 수 있도록 말이다.
※ 원문에 게시되는 글은 모두 의학적 소견이 아닌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자세한 증상이나 문의는 가까운 동물병원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