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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솔 Dec 22. 2020

사무실 건너 붉은 조명이 켜질 때.

2.

이제 익숙한 하루 절반의 공간.


지옥철을 탄 지, 어느덧 3주가 되었다.


동물병원에서 프로듀서로서의 삶은 꽤 평범하다. 좁은 사무실에 앉아 촬영 스케줄을 짜고, 영상을 만들고, 업로드하고 그것이 다인 삶이지만, 나름 재미를 느끼고 살고 있다. 동물병원에서 내가 무슨 일을 하게 되는 건지 첫 주에도 알지 못했지만 이제는 출근해서 편집하는 일이 나름 익숙하다.


동물병원의 첫 소감이라면 ... 다소 낯설었다는 점이다. 인턴생활도 하고, 프리랜서로도 활동해보았지만, 진짜 직장이라고 불리는 곳은 처음이었기에 직장인으로서의 삶이 익숙지 않은 탓도 있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일해본다는 감정이 가장 컸다. 흔히 동물병원이라고 하면 수의사들이 일하는 곳인데, 프로듀서로서 일하게 된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하니 말이다.


모든 신입들이 그렇듯, 처음 직장에 도착하면 얼타는 것이 주 업무가 된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사무실은 어떤지, 작업하는 환경은 어떤지 하나하나 새롭고 낯선 것들 투성이다. 때문에 사수가 있고, 사수를 통해 인수인계를 받아 기초적인 업무부터 진행하는 편인데, 신입부터 프로듀서로 일하게 된 나에게 사수란 있을 리 만무했다. 미디어/홍보 팀 자체가 신설이다 보니 신입이 되자마자 메인 제작자가 되어버린 셈이다. 동시에, 채용자가 병원장님이다 보니 오너가 영상 관련 업계 종사자가 아닌 수의사가 되어버린 이상한 삶을 살고 있다.


때문에, 나는 얼을 탈 시간도 없이 바로 업무에 투입됐다. 투입된 게 아니라 이제 시작점이 나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병원이 어떻게 돌아가는진 하루로 충분해야만 했다. 다른 수의사 분들, 테크니션(동물병원에서 간호사 역할)분들의 이름을 외울 겨를도 없이 사무실에 짱 박히게 돼버렸다. '어떻게 좋은 인상으로 인사하지?' 따위의 고민을 한 시간이 의미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직장이 별로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하고 싶다. 병원장님의 우리의 업무를 존중해주고 이해해주시는 편이며, 다른 부서와 마찰도 아예 없다 해도 무방할 정도로 잘 독립되어있다. 함께 일하는 분도 코드가 잘 맞아, 서로 존중하고 일하는 편이며 업무량도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많지 않다. 신입치고 정말 좋은 직장에, 좋은 대우를 받게 일하게 됐다는 것에 늘 감사해야 할 판이다. 


그렇게 3주가 되었다. 얼렁뚱땅 직장인이 되었고, 명함에는 PD라는 글자와 내 이름 세 글자가 선명하게 박혀있다. 정신머리는 아직 대학교에 두고 온 것 같지만, 몸만은 피곤에 절어 아침 출근길에 맡기게 된 것이다. 




2차 동물 의료기관으로 소개되는 우리 병원은 꽤 아픈 아이들이 많이 오는 곳이다. 동물병원이야 당연히 아픈 동물들이 오는 곳이지만, 단순한 증상으로 가벼운 처치만 받는 아이들 외에 DNR(Do Not Resuscitate:연명 소생술을 하지 않는다는 약자)이라고 적혀있는 아이들도 많이 있는 편이다. 입원실 안에 누워 마지막 숨을 뱉느라 지친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동물을 키워본 적 없는 나로서도 마음이 괜히 무거워지곤 한다.


우리 병원만 그런 건지 알 수는 없지만, 동물병원이라는 게 사람들이 사는 병원처럼 서글픈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사람들이 바쁘고 분주해서 뛰어다닌다던지, 바닥에 피가 한 움큼 쏟아진다던지 이런 일은 지금까지의 경험상 없는 듯하다. 다만, 환자를 대하는 마음만큼은 그에 못지않게 진지하고 엄숙하다.


여기에 와서 가장 먼저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붉은 조명이었다. 사무실에 있다가 탕비실에 가려면 처치실과 입원실을 지나야 하는데, 간혹 한 번씩 처치실 쪽에 붉은 조명이 들어올 때가 있다. 처음에야 이유를 모르니까 이리저리 돌아다니곤 했는데, 나중에서야 붉은 조명이 응급상황이나 보호자 면회를 뜻한다는 걸 알게 된 후로는 함부로 지나다니지 않는다. 


붉은 조명은 지금 응급 상황임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보호자에 대한 존중의 의미를 담고 있다. 병원이라는 곳은 당연하게도 아프고 병든 아이들이 오는 공간이다. 그렇지만, 병원이라고 해서 24시간 365일 우중충한 삶을 사는 공간은 아니다. 직원들은 간혹 소소한 농담을 주고받고, 아픈 아이들에게 애정을 쏟기도 하고, 이런저런 일상 이야기가 동시에 공유되는 공간이다. 붉은 조명은 '이곳이 병원'이라는 암묵적인 약속을 전제로 한다. 보호자가 면회를 위해 입원실로 들어오게 되면 처치실 전체가 붉은 조명으로 물드는데, 이 순간만큼은 대부분의 직원들도 담소를 멈추고 침묵을 지킨다. 일상을 살다가도 이 순간만큼은 보호자의 삶에 좀 더 존중을 보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아직까지 생사를 넘나드는 응급상황은 본 적이 없지만, 눈빛에 생기가 사라진 아이가 내 눈을 보고 숨을 헐떡이는 순간은 꽤 여러 번 보았다. 간혹 입원실을 지나다가 그런 아이들의 눈빛을 보며 나는 말없이 침묵으로 조용히 시간을 보내곤 한다. 어느 곳을 향하는지도 모르는 눈빛을 보고 있으면, 보호자들의 아릿한 심정까지 느껴져 마음 한편이 시큰하기도 한다. 아직까지 내 앞에서 숨을 거둔 아이들은 없지만, 만약에 그런 순간이 병원 안에서 벌어진다면 어떤 하루를 보내야 할까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다.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겠다면 그건 거짓말일 것이다. 얼렁뚱땅 프로듀서가 된 주제에 생명에 대한 열렬한 의식이라던가, 아픈 아이들에 대한 뼈아픈 안타까움과 봉사의식을 가질 리가 만무하다. 다만, 아픈 아이들의 색색 거리는 호흡소리에 괜히 마음이 무겁고, 이런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회복해서 보호자 품으로 돌아가 며칠만이라도 같이 시간을 보냈으면 하는 마음만큼은 진심이다. 


동물병원 프로듀서가 되었다는 건, 보호자의 가까운 지인이 되어버린 기분이 든다. 수의사들은 그들을 치료하는 구원자가 되지만, 의학에 대한 일말의 지식조차 없는 나는 좀 서글픈 방관자의 역할이 될 수밖에 없다. 어떤 일인지 물어보고, 증상을 듣고, 아파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아야 하는 사람. 그리고 때론,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담아야 하고 기억해야 한다. 아니, 기억해야 하는 것을 넘어, 면밀히 기록하여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전달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아픈 아이들은 조금이라도 나은 하루를 보내길, 마음 졸이고 있는 수많은 보호자들 품으로 돌아갈 수 있을만한 기적이 일어나기를 작게 보태어본다.


※ 원문에 게시되는 글은 모두 의학적 소견이 아닌 개인적인 견해입니다. 자세한 증상이나 문의는 가까운 동물병원을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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