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솔 May 09. 2018

" 수많은 너와 "

네가 없는 곳에서 너와 마주하다.

네가 여전히 존재하기에,

늦게까지 일을 하느라 아침해가 뜨고 나서야 잠들었다, 오후 늦게 돼서야 일어났고 빨래한 옷을 입고, 향수를 뿌리고 나왔다. 날이 좋았고, 바람은 추웠다. 나는 들떴고 평온했다. 모처럼만의 외출에 평범한 날이었다. 적당히 추웠고, 가방은 가볍고, 발걸음도 괜찮은 하루였다. 오늘의 기분을 이상하게 한 건 단 하나, 수많은 너와 마주쳤다. 


여유로웠다. 삶이 정착되기 시작하면서 불안한 감정쯤은 과정이라고 느끼고 여유로움을 만끽했다. 보상을 받아야 했고 큰 방법 없이 그냥 나를 쉬게 두면 만족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한 두 달간 이어지다 보니 무뎌졌다. 아니, 슬슬 잊혔다. 원하는 걸 하는 삶은 잡생각을 잊게 했고, 맡은 일들에 아이디어만으로도 생각은 과부하였다. 밤에 맥주를 마시고 글을 쓰고 노래를 듣고 꽤 괜찮다고 느꼈다. 식구들과 가끔 저녁을 먹으러 가고, 술을 마시고, 웃고 떠들고. 괜찮음은 기만, 꽤 행복하다고 느꼈다. 이따금씩 찾아오는 외로움도 즐기곤 했다.


나는 멍청했다. 잊고 산다는 게 결국 모든 게 끝났다는 이야긴 아니었다. 지워낸다는 것과 비워낸다는 것이 잊는다는 것과는 엄연히 다른 이야기였다. 나는 이따금씩 뒤돌아보고, 비슷한 장소에서 발길을 떼지 못했다.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에 슬쩍 눈을 돌리고, 발을 굴리고 수만 번은 뒤돌아섰다. 너이기 전에 나를 의식했고 당연한 거라 위로했다. 그렇지만 암만 떠올려봐도 너는 그곳에 없었을 터였다.


부끄럽게도 혹여 마주칠까 연습했다. 어떻게 인사를 해야 할까, 아니 인사는 해야 하나. 네가 지금의 누군가와 손을 잡고 있으면 어떡할까. 내 표정은, 내 몸짓은, 내 마음은 어떻게 해야 할까. 너는 이 마음을 알았을까, 순식간에 초라해진 기분이 나를 바닥 아래까지 잡아당겼다. 그 순간이 나를 집어삼켰다. 수치와 애달픔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역한 느낌이었다.


어딘가에 숨어서 술래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근처에 도착하면 너는 불쑥 나타났다. 익숙한 장소 부근에 서서 얄미운 표정을 짓고서 찾았다는 표정으로 나를 툭 찍고선 쉼 없이 도망친다. 나는 그저 이 상황이 익숙해지지 않아서, 받아들여지지가 않아서 막연히 너를 좇는다. 두 발은 갈 길을 잃고 내 손을 그저 더듬거리며 좇는다. 목적지도 없는 채로 좇는다.


흔적을 맨손으로 뒤져낸다. 상처받을 걸 알고서도 앞을 가린 채 장님처럼 나는 수많은 너를 뒤져낸다. 때론 울고, 때론 웃고, 때론 화내며, 때론 멍하니 땅끝 아래까지 파보아도 너는 없다. 나는 이내 포기해야 될 때가 왔음을 알고 가만히 손을 털어내지만 뒤돌았을 때 어느덧 쌓인 그 무수한 조각들이 모두 너였음을 깨닫고 상처 난 손으로 허망하게 나를 감싼다.


이따금씩 약처럼 찾아야 하는 너를 막을 수가 없다. 감기에 걸린 사람처럼 수없이 앓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감기약을 찾게 되는 그 순간을 밀어낼 수가 없다. 무기력한 절망감에 빠지는 그 순간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수많은 너와 마주쳤다. 나는 수없이 또 무너졌다.


매거진의 이전글 " 네가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