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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솔 Oct 20. 2018

"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

남은 건 볼품없지만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건 볼품없지만


종종 너무 잘 살아서 탈이었다. 허전한 기분 어딘가에 깊숙이 처박아두고 생을 사노라면, 그리 버겁지 않다고 할 정도로 괜찮았다. 죽을 만큼 끼니를 거르지도 않았고, 애태우게 슬픔을 쏟아내지도 않았다. 간혹, 공허한 기분이 들면 술 한잔 하고 잠들었고, 외롭다 느껴질 때에는 주위에 전화를 걸어 헛소리를 하곤 했다. 생이 이어짐에 따라 의무처럼 살아간다는 것이 어쩌면 위로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마치,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 같은 걸 만들어줘서 괜찮게 받아들였다. 주위에 말을 빌려, '꼭 그렇게 죽을 것 같진 않더라' 가 가장 어울리는 표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미련한 글을 쓰는 이유라면 나도 어찌 설명해야 할진 잘 모르겠다.


적막한 날들 뒤로, 얼마 전에 보낸 나의 미련이 네게 도착했음을 안다. 네가 요구했던 것들에 묵묵히 수긍하는 마음은 너를 향한 마지막 존중과 배려였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가 함께였다는 사실을 망치고 싶지 않은 일종의 욕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네가 지켜주지 못해 쉽게 던져버린 것들이 여전히 나를 너무 아프게 하지만, 아프다는 사실조차 미화하고 싶은 나의 애정이 너에 대한 내 마지막 미련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예전과 다를 것 없이 쓸쓸한 애정을 담아 네게 보냈다.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았던 건, 어쩌면 네게 다시 상처가 될까 봐 그게 너무 미안해서 전처럼 후회에 남을까 봐 그러지 않았다. 가을이 나를 재촉한 들, 나는 기어이 그러지 않았다.


이전엔 내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더니, 이제는 시도 때도 없이 나를 괴롭히는 수준에 그쳤다. 이런 것들을 척도를 가지고 판별할 순 없지만 꽤 수긍하고 살아가는 중이다. 사랑한 뒤에 남은 잔재들이 일종의 몫처럼 나의 생을 간지럽힌다. 불편하고도 반가운 이 잔재들을 애써 치우지 않는 것은, 아직까지는 그대로 둬도 괜찮다는 나의 미련한 마음의 뜻이다.


적막한 피아노 소리, 우울한 LOFI음악, 따듯한 아메리카노, 은색으로 빛나는 목걸이, 떡볶이, 은은하게 나는 향. 이런 것들은 여전히 너를 떠올리게 하는 도구가 된다. 추억이 어떤 매개체를 통해 내 삶에 깊숙이 파고드는 때 벗어나야 한다는 걸 깨닫지만,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이런 것들 앞에서 나는 한없이 무기력 해진다. 이따금씩 나의 발목을 꽉 쥐고 하루를 잠식하지만 묵묵한 인내로 벗어나려 드는 것 밖에 답이 없다. 참 많기도 하다, 너를 기억하게 하는 것들이 이리 많은 줄 알았다면 차라리 모르는 게 좀 더 편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문득, 너는 이제 무엇으로 날 추억하는지 궁금해지곤 한다.


네 물건을 주워 담았을 때만큼 비참한 건 없었지만, 그것만큼 시원한 적도 없었던 것 같다. 오래된 숙제 하나를 조금 이르게 풀어낸 기분이라 맘이 놓인다. 마지막까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혹여 네게 다시 미안해질까 싶어 조그맣게 미련을 담았다. 옳은 방법인 줄 모르겠다. 적어도 내가 추억하고 싶다는 명목마저 뺏기고 싶지 않은 건지, 아니면 자질구레한 미련을 알아줬으면 하는 마음인지, 소심한 복수 같은 건지.


의연하게 답하는 너의 앞에 떨어진 나의 무수한 감정은 한량 같은 슬픔이었고, 너의 말은 하나씩 비수가 되었다. 나는 자꾸 울기만 했고 대답 한 번 똑바로 하지 못했다. 순간에 순간을 더할수록 나의 자책감은 배가 되어 나의 눈물샘을 짓누르고 감정선을 휘둘렀다. 아직도 지독한 마무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나는 무의식 중에도 자꾸 이런 장면들만 떠올려 나를 갉아먹는다. 네가 날 나쁜 사람으로 기억할지, 날 미워할지 문득 묻고 싶어 진다. 뻔히 원하는 답일지라도 확실한 대답 한 번만 들을 수 있다면 조금 괜찮아질 수 있을 것 같은데, 당분간은 지쳐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다. 


지친 얼굴 붉게 달아오른 채 맨발로 젖은 흙 몇 번을 차내다 보니 그만 서러워져 심해 아래로 가라앉혀버렸다. 술을 아주 많이 마셨고 감정의 독주를 홀로 몇 잔이나 더 들이켰다. 여전히 나는 선택에 후회했으며 나의 이른 마음에 또다시 고배를 마셨다. 진심이 아니었음에도 나는 또 '그냥'이라는 말을 되뇌었고 짧은 대답조차 쉽게 하지 못했다. 여전히 나는 많이 변하지 못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 감정의 성숙과 성장의 고비를 몇 번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대로라, 때론 원망해도 별도리가 없다고 고개를 내젓는다. 하나, 너무도 태연하게 변해버린 사람 때문에 나는 약속과 하고 싶은 말 모두 깊이 바다 아래로 묻어버리고 그런 사람처럼 태연하게 젖은 흙을 몇 번이나 더 걷어 차냈다.


내 생의 초첨이 오로지 너였을 때, 나는 네 생애 고작 노이즈뿐이었을지 묻고 싶다. 네게 좋은 사람이고 싶었던 욕심이 어긋난 걸까, 아니면 과했던 걸까. 사랑한다고 뱉었던 나의 입은 지나치게 조용했고, 침묵의 가운데  소리 없는 너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Everything I ever did, I did for her. Now she’s gone, but I’m still here. what would she think of me now " 


우리는 헤어졌다. 이따금씩 이 사실에 대해 여러 번 상기시키곤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꼭 우리 사이가 퍽 괜찮아질 것 같다는 희망에 빠지곤 한다, 그럴 일이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럴 일이 없다는 걸 알지만. 우린 다를 줄 알았지만 성장하지 못한 채 남들처럼 헤어졌고, 특별할 것 없이 서로에게 아픔이 되었다. 맹목적인 사랑의 마음은 방향을 잃었고, 말처럼 아직은 그리움에 빠져 얼마 동안은 더 허우적댈 것만 같다. 그럼에도 내가 간혹 추억하고 싶은 이유라면 우리 참 좋았으니까, 그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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