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솔 Nov 04. 2018

" 우리의 단상 "

하고 싶은 말.


'우리'라는 이름으로 한 때 묶여져있던.


여전히 새벽녘에 일을 마치고 돌아오고 있습니다. 사람들 모두 소란함을 끝낸 때, 저는 이제야 그 준비를 하곤 합니다. 피곤할 법도 한데 내 공간에 발을 디디는 순간만큼은 언제 그랬냐는 듯 제시간에 푹 잠깁니다. 창 밖이 어둑해지고, 옅게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가을밤의 쌀쌀함이 내 공간을 가득 휘젓습니다. 감기에 걸려서 며칠이 넘도록 고생 중이지만 여전히 창문을 열어놓고 지냅니다. 집안이 엉망이고, 밀려놓은 빨래가 수북하지만 나는 그런 것들에 개의치 않으려 노력합니다. 무슨 의미인진 모르겠지만 이런 소박한 말들도 하게 되는 지금 당신이 즐겨마시던 맥주와 함께 새벽녘을 보내는 중입니다.


여전히 병원을 다니고 있습니다. 이런 저를 당신이 동정할까 쉬운 이야기를 쉬이 던져봅니다. 당신을 만나던 날에도 아팠던 이유에 당신이 없진 않았습니다. 앞서 말했듯 안정적인 삶에 기대면 기댈수록 나는 그것들에 대한 두려움도 키웠어야 했거든요. 당신을 탓하거나 원망하려는 게 아닙니다. 이젠 그랬다고 인정할 수 있는 때가 왔고, 저는 그런 사람이었다고 말을 해주지 못했던 같았거든요. 그때의 저는 제 근간이 흔들릴 만큼 불안정한 삶에 위태로이 발을 딛고 있었습니다. 모든 말을 전할 수 없지만, 그때만큼은 정말 죽어버려도 괜찮을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 스스로도 이대로 죽어버리는 게 아닐까 종종 걱정하곤 했으니까요. 당신이 궁금한 건 지금일 테죠, 지금의 저 또한 근근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게 괜찮다거나 행복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말 그대로 근근이 살아는 가고 있습니다. 간혹 사는 게 괜찮다고 느껴지는 날이면 펑펑 즐기곤 합니다. 이것들이 언제 돌아올지 몰라서 여전히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먹던 약이 한 알에서 두 알, 두 알에서 세 알까지 늘었습니다. 밤에 먹는 진정제는 아침의 저를 때론 곤혹하게 만들곤 하죠. 약이 많아질수록 삼키는 게 어렵습니다. 제 아픔에 대해 너무 주저리주저리 떠들고 나면 이게 꼭 거짓말 같다는 기분이 듭니다. 그래도, 할 수 있을 때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앞서 저질렀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그래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것들이 결코 변명이 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당신만은 이해해 주지 않을까, 그런 못된 생각을 합니다.


당신 품에 안겨 한껏 울음을 토해냈던 날은 시간이 지나도, 아마 제 평생에서 잊히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 날 흘렸던 눈물은 그 어느 날보다 솔직하고 처량한 눈물이었거든요. 당신의 부드럽던 손길로 나의 머리칼을 쓸어주던 때가 종종 떠오릅니다. 당신의 목소리만이 조용한 공간을 가득 메우던 날, 제 생애 꼽을 수 있는 가장 로맨틱했던 순간의 일부입니다. 그날 밤을 기억합니다. 그 날의 향기, 온도, 공간의 촉감까지 뭣 하나 선명하지 않은 게 없습니다. 하나, 그런 것들도 간과할 만큼 내가 도망치려 했던 건 무엇이었을까요.


언젠가 당신 내게 사랑에 대해 이래저래 이야기했던 날이 있었습니다. 사랑이 늘 쉽지는 않고, 사람을 만난다는 건 늘 버겁게 느껴지지만 나만큼은 그게 아니라고 말하던 날이 있었죠. 사랑한다는 말이 어렵지만, 결코 어렵게 느껴지지 않는 순간이 올 거라는 확신도 있었죠. 하나, 목적이 있는 열망은 불안을 낳고 불안은 순식간에 생을 쉽게 잠식합니다. 어쩌면 너무 이른 확신 속에 정작 중요한 마음을 쉬이 피해버린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도 어쩌면 결코 다름이 없었습니다. 다만, 너무 평범하지 않도록 이야기한 것들이 오히려 우리를 더 옥죄어 온 걸지도 모릅니다.


어렵게 마지막 이야기 꺼내던 날, 나는 동네가 떠나가도록 울어댔습니다. 약기운에 취해서 이겨내려 부릅뜬 눈에서 사정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죄책감이었는지 원망이었는지 사랑이었는지 후회였는지 그 어떤 감정이 나를 그토록 서럽게 만든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유를 찾고 싶지만 아직까지도 제가 왜 그렇게 울부짖었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네요. 당신은 어쩐지 계속 괜찮다 말해주었지만, 나는 진정되지 못한 마음으로 그렇게 몇 시간을 내리 쏟아냈습니다. 나는 괜찮아지려 퍽 노력했습니다. 노력했다고 말한 만큼 이루어졌으면 더할 나위 없었지만 어쩐지 그렇게 말하기가 부끄러워집니다. 새벽까지 뜬 눈으로 지새워 서툰 이별 뒤로 오래 잠들었던 날 나는 다음날 저녁이 다 되어서야 일어났습니다. 창밖은 조용하고 집 안은 죽을 만큼 적막했습니다. 방에 불을 켜도 뜬 눈이 부어 앞이 흐렸지만 깨었다는 느낌만큼은 선명했습니다. 약 몇 알을 챙겨 먹고 정처 없는 생각에 한참 맴돌았습니다. 이제 더는 위로도 없는 적막한 내 공간에서 몇 날 며칠을 그렇게 죽은 듯 보내야 했습니다.


당신을 만나고 난 뒤에 다른 사람도, 사랑도 스쳐간 적 있었습니다. 사랑한다는 사실이 여전히 어렵지만 순간에 진심을 더해 노력하면 괜찮아질 것 같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죠. 우리가 늘 그랬던 것처럼, 생은 이어져야 하고 사랑에 빠지고 사람을 만나는 순간은 변함없으니까요. 헌데도, 아픔은 늘 변함없고 이별은 당연합니다. 저는 여전히 그런 것들이 너무 멀게만 느껴집니다. 수없이 아프고, 어디에 두어도 변하지 않을 상처 같은 것들은 시간이 지나도, 아무리 겪어도 도저히 태연해지지가 않습니다. 때론, 이 모든 것이 지난 나의 과오에 따른 업보일까 싶어 참회하고 후회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로는 설명되지 않는 사랑의 순리 같은 것이겠죠. 당신, 여전히 사람을 만나지만 진심을 주는 일이 어렵다고 했죠. 저 또한 여전히 사람을 만나지만 진심을 주는 것이 날이 갈수록 두렵습니다. 이것 또한 제 앞에 놓여 있던 합당한 과오 같은 걸까요.


당신을 잃었다는 게, 제가 가진 공간 하나를 잃었다는 것만큼 생각보다 큰 것이었습니다. 제가 잃어버린 것이 모두가 아닐지는 몰라도, 드문드문 기억에 잠기게 끔 저를 위로하던 많은 것들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나에게 당신은 장면들이 가득 담긴 영화였으며, 소리들로 이루어진 음악이었습니다. 아침부터 밤, 오늘부터 내일까지의 날, 글이었고 책이었습니다. 모든 문장으로 시작했던 당신의 날을 기억하시나요. 당신 덕분에 써냈던 가장 애틋했던 글이 아직도 내게 소식을 전합니다. 그때만큼은 모든 날이었던 그 진심이 다른 사람의 눈에게도 그리 보였겠죠. 아직도 글을 몇 번씩이나 다시 읽어보곤 합니다. 하루가 길다 느껴지는 날에는 문득, 그 글 안에 잠겨 한참을 허우적 대기도 합니다. 우리가 인정했듯 삶에 영원한 건 없습니다. 하지만, 이 말이 거짓말처럼 느껴지기에도 우리에게 간절하게 남아있던 글이 몇 자락 남아있네요.


당신, 얼마 전에 조용히 내게 안부를 물었습니다. 당신, 여전히 제가 애틋하신가요. 혹여 제가 밉진 않을까 걱정되는 마음에 주저리주저리 제 마음을 읊어댑니다. 그때에 모든 일들이 때론 저를 향해 죽일 듯이 달려듭니다. 죄책감의 이름으로 몇 번 씩이나 찾아올 때면, 나는 여러 번 저를 씻어냅니다. 절 죄여 오는 죄책감에 대한 속죄 일지는 몰라도 저는 때론 그렇게 스스로를 혹사하곤 합니다. 가끔은 이런 역설이 부끄러워집니다. 당신에게 벗어나려 하고 용서받으려 할수록, 어딘가에 당신이 그만큼 존재하며 우리가 잘못되었다는 걸 인정하는 셈이니까요. 이것들로 당신이 가진 상처를 대변할 수 없으리란 걸, 그리고 당신이 가진 원망을 지워내리라 확실하지 않습니다. 우리 예전에 이야기하던 것처럼 상처라는 건 그렇게 쉽게 극복되는 게 아니니까요. 그래서 결국 우리가 헤어져야 했었으니까요, 우리 이야기의 의미를 알고 있겠죠.


용기가 부족해 이렇게 글로써 진심을 전합니다. 우습죠, 예나 지금이나 겁먹은 꼬마 같은 건 변함이 없습니다. 제가 표현할 수 있는, 제가 제일 잘하는 것이 글뿐이라 말없이 저는 써내고 고치고 써내고를 반복합니다. 이 몇 자가 우리를 알게 하지도 않지만 당신만이 알고 있기를 조용히 소망합니다. 우리가 다시 돌아갈 수 없고, 그 시간은 무엇이 되어도 변함이 없다는 것만큼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짧았으나 중후했고, 상처였으나 그에 따른 성숙이었습니다. 진심이란 말로 모든 날을 지나왔습니다. 세상의 불균형 속에서도 서로를 위해 균형을 맞추려 들었던 우리의 결말이 결코 아름다운 것들로 포장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였다는 사실로 당신과 내가 있었다는 사실이 저는 결코 헛되지 않았다 느낍니다. 덧없는 우리의 생이 부질없었음 보다, 소박하고 간절했다는 것에 온 진정을 다하고 느낍니다. 날이 갈수록 추워집니다. 따듯한 차 한잔을 같이 하진 못할지라도, 멀리서 당신의 안녕을 조용히 빕니다. 부디, 모든 것이 괜찮아지는 날까지 몸조심하세요. 고맙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