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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솔 Oct 07. 2018

" 네 향 가득 "

네가 없는 곳에서도.

갑작스레 찾아오는 네 향기에 취해서는.


여느 때처럼 일을 하는 중이었다. 바쁘게 발걸음을 움직이고 있었다. 신경 쓸 것들이 너무 많아 머릿속이 새하얗게 번져오는데, 네 향과 똑같은 향을 쓰는 사람과 마주쳤다. 주위에서 한참을 머물다가 이내 돌아섰지만 자꾸 눈이 가는 것만큼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하루를 망쳤다. 하루의 마지막에서.


네 향기가 맴돌았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이 향의 설명은 온통 너로 대체되어간다. 그냥 네 목 언저리에서 나던 향, 너 어깨에 기대어 자고 있노라면 은은히 퍼지던 향, 씻고 나면 네 온몸에서 나던 향, 네 손을 잡고 나면 내 손에서 그윽이 퍼지던 향, 너를 꼭 끌어안고 있으면 온통 가득하던 그 향. 그 향 그대로였다. 우습게도 나는 그걸 다른 사람 때문에 추억하고 있었다. 간간히 너를 잊어보려고 애쓰는 내게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그런 것들을 말이다.


그때도, 지금도 느끼듯이, 너의 사랑스러움의 일부가 아직도 내 생을 잠식하고 있다.


나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생각에 잠겨있는데, 타인의 시선은 늘 삐뚤어진 느낌이다. 그깟 게 대수냐며 온통 큰 웃음으로 대답하는 타인의 눈빛 안에 나는 벙어리가 된 채로 그저 시선을 회피하고 말았다. 대수라니, 내 하루의 근간을 온통 흔들어 놓을 만큼 큰 것들이 대수라니 화가 나다가도 무기력한 마음에 말을 아낀다. 타인의 시선이 결코 나의 마음 전체를 대변할 수 없다는 걸 너를 통해 깨달았기에 나는 그 진리를 여전히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맞다. 한두 번이 아니다. 지난번에는 너랑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마주치다가 길을 멈췄고, 너랑 똑같은 이름 앞에서 한참을 주저했었다. 네가 좋아하던 인형 앞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좋아하는 음악들을 지워내고, 문득 떠오르는 너와 함께했었던 기억 앞에서 무너졌다. 이 모든 것들이 불과 짧은 시간의 기점을 두고 나를 찾아오고 있다. 나의 숨통을 조르고 나의 발길을 막고 나의 일상 한 구석에서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지만, 나는 이것들이 퍽 싫지만은 않다. 때에 따라 원망스럽지만, 그만큼이나 덧없이 소중하다.


어쩌지, 함께 했던 곳, 함께 보았던 것, 좋아하던 것, 싫어하던 것 모두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데 천천히 네 모습이 잊히기 시작한다. 나를 바라볼 때 그윽하던 네 눈망울이 점점 흐려져, 이내 일정 기억에서 멈추곤 한다. 네가 나를 보며 천천히 미소 짓던 모습이 이제는 어떤 과정이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네가 그리운데 벌써부터 떠오르지 않는 것들이 생긴다. 어떡하지.


우습게도 나는 하루를 망쳤다고 느낄 만큼 엉망이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서 멍하니 앉아있었고, 다루는 칼이 낯설어 손을 베였고, 하던 음식을 까먹어 태우고 말았고, 생각에 잠겨 불에 손을 데고 말았다. 양 손을 다치고 나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게 꼭 며칠간의 내 모습 같아서 스스로가 우스웠다. 그렇게 다치고 나서야 다쳤다는 걸 알았다는 것도 꼭 똑같아서 고개를 처박고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이렇게 다칠 때면 네가 무어라도 잔소리하거나 걱정해주거나 했는데 같은 멍청한 생각이나 하다가 다시 네 생각에 푹 잠겨있었다. 그 짧은 시간 안에 모든 걸 망치고, 하루를 온종일 망쳤다고 할 만큼 네가 큰 존재라는 걸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내내 떠올렸다. 또 뭐가 있었을까. 창문에 머리를 처박고선, 쏟아오는 졸음과 바람을 맞대며 내가 하는 거라곤 고작 네 생각 하나라니, 비참하게도 우습다. 그렇게 하루를 고단하게 보내 놓곤 스스로 위로 대신 자학 따위 하고 있다니. 네가 걱정 어린 마음으로 평소에 말하던 모든 것들이 시간이 지나고서도 나아지지가 않는다. 어쩌면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했다는 네 말이 비수처럼 날카로워서 나는 이 모든 것을 다시 되짚을 용기가 나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 쓸데없는 잡생각에 밀려 새벽 밤이 도착하고 나서야 나는 어려운 마음으로 잠이 든다.


우리는 메리 크리스마스도 하지 못했고, 이렇다 할 예쁜 추억도 몇 남기지 못했으고, 이룬 것보다 바람이 더 많았으며, 몇 구절 떼지 못하고 안녕을 고했다. 서로의 소중한 날에 있어주지도 못했고, 아직 표현하지 못한 거대한 것들이 마음속에 너무 많이 남아있다. 하나, 나는 너무 사소한 것들로 너를 가득 채우고 있으며 그 사소한 것들로 온통 너를 가지고 있다. 그 사소한 것들의 영원을 기약할 순 없었지만, 과하게 포장되지 않았던 우리의 사이를 나는 여전히 사랑한다.


돌아오는 길에 이상한 욕심이 생긴다. 오늘은 글을 써야겠다, 네가 생각나는 대로 써야만 오늘은 후련하겠다. 사랑만으로 우리가 충분하지 않았다면 나는 더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한다. 그냥, 문득 내가 글을 쓴다는 걸 네가 떠올려서 이 문단을 한 번만 읽어보았으면, 그리고 늘 두 번째인, 용기가 없었던, 자신이 없었던, 멍청했던 내게 태연하게 한 마디 걸어주기를 조용히 소망한다. 네 향기가 그리워서, 사실 그냥 네가 그리워서 갖가지 핑계를 두고 글을 쓰는 나 스스로도 비참하고 찌질하다. 그래, 보고 싶다는 말이 더 간략하고 더 선명할 텐데 왜 이런 구차한 문장들로 표현해 내는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을 견뎌야 하는 게 나에게 주어진 책임이 아니었을까. 네 향기가 그러하듯, 내 글이 그러하듯.


이토록 가벼운 것들에 너를 부유히 떠올리는 건, 다른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다. 네가 그립다고 추억하고 싶은 마음이며 동시에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원망이며, 네가 예전 그대로일까 하는 말 못 할 미련에 가까워서이다.


나는 뭘 기억하고 있는 걸까, 네 향이었을까, 네 모든 것이었을까, 아니면 너 자체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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