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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솔 Feb 18. 2018


" 당신과 나의 문장들 "

내가 사랑했던 너는 온통 시였다.

책 속 어딘가에 온통 당신이었다.

동경이었다. 잠 못 드는 밤을 넘어선 동경이었다. 상상 속 당신은 멋진 사람이었다. 인기 많고 누구에게나 친절했으며 열정적이고 당신만의 뜻이 있었다. 그런 당신을 동경하면, 나도 그렇게 될 것 같아 수없이 동경했다. 내 눈 안에 말 걸기도 낯선 당신이 차올랐으며, 이내, 당신의 눈에 차올랐다.
" 내 전생에 너를 얼마나 울렸기에 한평생 날 붙들고 잠 못 들게 하는가 " /  임보, <짝사랑>


거기 있었던 당신 내 맘속에 잠식한 종양처럼 크게 되었다. 일상 속의 당신은 덤덤했지만 당신에게 혹여 부담일까 봐 떨리던 손과 눈으로 당신을 향했다. 혹여나 하고 잡힌 두 손 위로 당신의 미소 하나가 내 눈 안에 들었을 때, 밤을 빛내는 별처럼 가득 채웠을 때, 시작돼버린 마음 뒤로 당신의 생각이 멀어지던 때, 나는 그때 당신이었고, 너였으며, 사랑이었다.
" 너는 분명 하나의 빛도, 잉크도 아니었는데 내게 번짐을 알려주었다 그 뜻을 깨우쳐주었다 이내 네가 내 안 가득 번지고 나는 막을 겨를이 없다 " / 백가희, <번지다>


우리는 사랑이었다. 그런 말로 정의하기에는 왠지 낯간지러웠고 수줍었지만 우리는 사랑이었다. 내게 속삭이던 목소리에, 살며시 스치던 손등에, 옅게 닿았던 입술에 사랑이라는 이름 하나를 붙여 우리를 불렀다. 그 순간에 만큼은 나는 온 우주가 멈춰버렸으면 하고 바라었다.
어쩌다 내 이름을 불러 준 그 목소리를 나는 문득 사랑하였다 그 몸짓 하나에 들뜬 꿈속 더딘 밤을 새우고 그 미소만으로 환상의 미래를 떠들다 그 향기가 내 곁을 스치며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나는 그만 햇살처럼 부서지고 말았다 " / 이남일, <짝사랑>


'예쁘다'라는 말에 말도 안 되게 손사래 치는 당신에게서 나를 보았다. 당신의 그 수줍은 표정이 나를 닮아있었다. 우리가 함께 하던 모든 순간이 예쁘지는 않아도, 우리가 함께 할 때의 모든 당신은 참 어여뻤다.
" 네가 숨을 쉴 때마다 그것이 퍼져가는 모양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예뻤다는 생각 뭐 보느냐고 네가 묻자 나는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를 몰라 너라고 대답하고 말았던 그 날 " / 황인찬, <겨울 메모>


별이었다. 당신이 좋아하던 것도, 당신이 약속했던 것도, 당신이 해준 이야기도 모두 별이었다. 정작 밤을 잊게만큼 아름다웠던 당신이 사랑하는 별이라니, 밤이 오면 별 하나에 이름을 붙여 당신을 만들었다. 거기 당신이 있었고, 밤은 어두움을 벗고 행복할 자격이 있다고 속삭였다. 그래, 그때 처음 알았다. 별이 당신이었음을, 이곳에 별이 있었음을.
" 나에게 다가오던 별이 있었다 내 품 안에 스러지던 별이 있었다 지상에도 별이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 / 정채봉, <그때 처음 알았다>


사실 어려웠다. 모든 것이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어디서부터 뭐가 어떻게 된 거지도 모르는 그때. 나는 그저 감정과 마음에 충실했다. 쓰던 글도 멈추고, 일상을 멈추고, 마음을 내보일 만큼 나는 나 그대로였다. 순수함의 본능이었다. 이해하기 힘들어 마음 아파 슬퍼져도 괜찮았다. 마저 읽지 못한 책을 빼앗기기 싫어서, 지독한 뜀박질 이후 물 한잔이 간절해서, 쓰지 못한 우리라는 글을 완성시키고 싶어서, 당신을 더 알고, 사랑하고 싶어 모든 것이 괜찮았다. 다만, 아스라이 무너진 마음의 당신을 보지 못한 것이 나의 큰 실수였으리라.
" 내가 읽은 시 중에서 가장 어려운 시가 너였다. " /  황금찬, <너는 시였네>


아팠다. 아프고 서럽고 그리웠다. 곁에 있어도 외로워지게 하는 당신을 나는 여전히 사랑했다. 한정적인 것들에 대해 부정적인 당신의 답에도 나는 그저 바라볼 수 있었다. 기다릴 수 있었고 참을 수 있었다. 그토록 많은 시간을 아프면서도, 티 한 번 내지 못했다. 울음 섞인 사랑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 할 때면 스스로 입을 틀어막고 숨을 멈추고 몰래 눈을 감았다. 그렇게 하고 나면 당신을 다시 사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고 나면 괜찮아지는 것만 같았다.
" 내 어둔 마음에 뜬 별 하나. 너는 내게 가장  큰 희망이지만 가장  큰 아픔이기도 했다. " /  저녁별, <이정하>


우리는 이별했음을, 다시 만날 수 없는, 영영 남이 되었다는 사실을 나는 인지하고 있다. 알고 있어도 잊을 수 없는 생각처럼, 부정하려 하지만 답인 것 같은 마음을 나는 알고 있다. 우리는 헤어졌고, 당신이 그토록 담담해지더라도 나는 생애 쓸쓸한 조각을 감당하려고 한다. 아픔도 그리움도 서러움도 온전히 내 것임을, 이것마저 당신의 흔적임을 감사하는 죄인처럼 나는 살아가야겠다.
"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내 가슴에 아직도 눈에 익은 별처럼 박혀 잇고 나는 박힌 별이 돌처럼 아파서 이렇게 한 생애를 버둥거린다 " / 문정희, <비망록>


이제와 보면 당신에게 너무 많은 마음을 한 번에 주었다. 그 오랜 시간을 걸어왔던 내가 줄 수 있는 것, 남은 시간에 줄 수 있는 것. 그것은 오직 나의 마음뿐이었다. 주기만 했으면 다행이었음을, 수없이 뺏기던 날의 당신의 표정을 기억한다. 당신을 웃게 하고 싶어 주던 마음, 당신이 웃어버려 뺏긴 마음. 그 모든 것들을 나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그러기에 나는 늘 슬프다. 어쩌면 이 생의 내가 가진 슬픔의 근원이 모두 당신에게로 시작된 걸까.
" 너의 허락도 없이 너에게 너무 많은 마음을 주어버리고 너에게 너무 많은 마음을 뺏겨버리고 그 마음 거두어들이지 못하고 바람 부는 들판 끝에 서서 나는 오늘도 이렇게 슬퍼하고 있다. " / 나태주, <나무 1>


때론 끝내고 싶지 않아도, 미처 다 끝내지 못했는데도, 그 순간이 다가옴을 직감으로 깨달을 수 있다. 그래, 어쩌면 나는 당신을 만나기 이전의 시간 속에서도 그 순간을 이미 직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당신의 '잘 지내'라는 이야기에 수없이 고개를 흔들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 잊으라, 그대가 말했지만 눈빛은 그게 아님을 고개를 끄덕여야 했지만 내 마음은 그게 아님을 " / 이정하, <저물녘>


원망이 없고 후회가 없다면 사랑을 말할 수 있을까.
" 사랑하지 말 걸 그랬다 그대 나에게 올 때 외면할 걸 그랬다. " / 용혜원, <밀러드는 그리움>


당신을 마주치고 당신과 함께하는 순간이 때론 나를 찾아온다. 집으로 돌아가는 퇴근길의 자주 가던 지하철과 골목길에서, 홀로 남은 방의 뒤편에서, 배게 위에서 천장과 닿을 것만 같은 그곳에서. 하나, 이제 당신을 만나기가 너무 힘들다. 이전에는 분명 당신이었는데, 그 모든 공간과 소리와 배경에 당신이 존재했었는데, 정작 당신이 없는 당신을 만나는 게 너무 힘들어져버렸다.
" 가끔 네 꿈을 꾼다. 전에는 꿈이라도 꿈인 줄 모르겠더니 이제는 너를 보면 아, 꿈이로구나 알아챈다. " / 황인숙, <꿈>


나는 당신의 그저 옛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지만은 않다. 욕심인지 알고 멍청한 미련임을 안다. 당신이 나를 떠올렸을 때 아팠으면, 당신이 나를 떠올렸을 때 일말의 죄책감을 부정하려 했으면, 당신과 친구의 이야기에 내가 간혹 있었으면, 때론 나처럼 술 한 잔에 그리워했으면, 그리움에 술 한 잔이기를, 그리고 무엇보다 잘 살았음을, 그럴 자격이 있다는 것을 잘 알기를, 여전히 예쁜 사람이기를, 이미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당신이 행복할 수 있는 더 좋은 사람을 만났으면 하고 밤에 간절히 빌어본다.
" 어쩌면 이토록 한 사람 생각으로 이 밤이 이다지 팽팽할 수 있느냐 " / 이병률, <몸살>


잊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아마 평생을 걸어가야 할 가시밭길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기어이 맨발로 그곳을 들어간다. 그렇게 혹사시키고도 아직 부족하다며 미련의 바다에 나를 침수시킨다. 왜 이토록 나를 학대하는지 모르지만 당신이 나를 이런 지옥에 빠지게 했다는 걸 상기시키고 싶음일지도 모르겠다. 내 생의 천국 같았던 당신에게 사랑의 찬가를 수없이 외쳤던 나를 다시 만나고 싶다. 
" 그대여, 내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나가지도 더는 들어가지도 못하는 사랑 이 지독한 마음의 잉잉거림, 난 지금 그대 황홀의 캄캄한 지옥에 갇혀 운다 " /유하, <사랑의 지옥>


그래, 이것이 당신이다. 이것이 이 모든 문장이 당신과 나의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늘 슬프다가도 행복하다고 느낀다. 얼마 전 들었던 당신의 목소리가, '좋은 사람이니까'라고 했던 그 문장이 헛되이 지 않도록 나는 괜찮다고 느낄 때까지 이 미련의 길을 걷겠다. 설령 그것이 나를 감정의 죽음으로 빠드린다 해도 나는 너무도 당연히 받아들이겠다. 내가 했던 말처럼, 당신이 언젠가 나를 마주하기를, 떨리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너무도 덤덤히 당신을 마주하는 내가 오기를 바라며 나는 사랑의 구절을 계속해서 읽어나가겠다.
"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그대만큼 나를 외롭게 한 이도 없다 그 생각을 하면 내가 꼭 울게 된다 " / 김남조, <편지>


나는 당신을 떠올린다. 모든 문장보다 내 마음을 울렸던 문장은,
" 아직도 너를 사랑해서 슬프다 " / 나태주, <이 가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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