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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솔 Apr 16. 2020

<8월의 크리스마스>

사랑을 간직한채 떠날수있게 해준 당신께 고맙단 말을 남깁니다.

로맨스 영화의 스터디셀러

22년이 지난 1998년도의 작품이지만, 2013년 재개봉을 통해 멜로영화의 입지를 증명했다. 내가 고작 두 살이었던 1998년에는 당연히 보지 못했고, 2013년에도 고삼이라는 명분하에 영화를 볼 수 없었다. 98년도 청룡영화제 최우수작품상과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작품상 ... 화려한 스펙에 혹했다기 보다 재개봉 할 정도의 매력이 있는 영화라는 점에서 우선적으로 끌렸다. 더군다나, 한때 2000년대 멜로영화에 푹 빠져있던 나로써는 아끼고 아끼다가 꺼내보게 된 영화였다.


허진호 감독의 멜로영화는 클래식하다. <봄날은 간다>도 그랬고 최근에 개봉했던 <선물>도 그랬다. 시대를 잘 그려낸 배경에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덧댄다. 유난한 사건이나 특별한 전개는 없다. 인물들이 가진 설정에 특별함은 있지만 유난 떨지 않는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장면들이 가진 매력과 특유의 레트로한 분위기 속 배우들의 일상같은 연기가 영화 속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들게한다. 허진호 감독의 노련한 촬영 기법도 한몫했다. 영화적 연출을 최소한으로 줄여 차분하고 멈춰있는 듯한 장면을 주어 관객은 조금 더 멀리 있게 만들지만 관객은 장면만으로 흐름을 추론해야 한다. 적막이 많고 느리게 흐르는 타임라인 속에서 관객은 그저 추론하듯 장면들을 읽어내야 한다. 부드러운 불친절함이 이럴 때 쓰이는 말이 아닐까. 


<8월의 크리스마스> 제목부터 이상하다. 한여름인 8월과 겨울의 크리스마스가 붙어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역설적인 제목의 배경은 영화에서 시작된다. 죽음을 맞닥뜨린 정원(한석규 분)과 다림(심은하 분)의 만남은 역설적이다. 둘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주체로 만나게 되는데 이는 삶에 대한 욕망으로 이어진다. 정원은 죽음을 받아야만 하는데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없게 되버린 것이다. 때문에 다림의 존재는 갈망이 되어버린다.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다림의 존재가 정원을 침묵하게 만든다. 정원의 겨울은 죽음이었고, 다림의 여름은 미래이기 때문에 둘은 만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8월의 크리스마스>였던 게 아닐까.


영화의 포커스가 어디에 있는가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다. 단순한 '사랑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 '죽음에 대한 성찰'을 논하고 싶은 것인지 영화를 보면서 어느 메세지에 눈을 맞춰야 할 지 헷갈린다. 영화의 전체적인 전개는 정원과 다림의 사랑이야기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으나, 홀로 멈춘 정원의 태도 속에서 간혹 죽음의 이야기가 보이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으라는 이야기에 '내가 왜 가만히 있어야 돼' 라며 울부짖는 정원의 모습. 그에게는 마치 죽을 날을 '가만히' 기다리라는 이야기로 들렸을 것이다. 젊은 나이지만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을 거부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죽음을 앞둔 사람이 보여주는 전개로 보았을 때 일반 신파극과는 다르다. 보편적인 정서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이 여과없이 보여진다. 슬픔을 강요하지 않고 절제하는 느낌이 강하다. 병원에 곤히 앉아 평범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되려 자극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평상에서 멀리 하늘을 지켜볼 때 마땅한 죽음 앞에 순서를 기다리는 정원의 모습은 고귀해보일 정도이다. 아버지에게 리모콘 사용법을 가르치다가 되려 화를 내버리는 그의 평범한 모습이 아팠고, 아버지 옆에 누워 잠을 청하는 아이같은 모습에 가슴이 시렸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순식간에 변하기도 하지만 주체적으로 죽음에 맞닿은 정원의 모습을 단순히 '슬픔'에 비유하긴 어렵다.


다시 돌아와, 사랑은 보편적인 감정이다. 시대가 변해도 모습을 바꾸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8월의 크리스마스>는 현실적이다. 영화 속 정원과 다림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는 것 만큼 영화를 빛내주는 것이 없다. 둘 사이는 뚜렷한 사건도, 계기도 없다. 여름의 하루에서 만난 둘은 오토바이를 타고 거리를 달리고, 놀이공원을 가고, 선풍기 바람을 쐬고, 우산을 쓰고 그게 전부일 뿐이다. 이런 장면들을영 화에 담아내는 것이 쉬워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분명 언젠가 한석규는 죽는다. 관객이 이것조차 잊고 몰입하게 될 쯤 죽음에 대한 메세지를 다시 상기시킨다. 이런 간극에서 설렘과 안타까움은 공존한다.


90년대 멜로 영화 중에서도 단연 노란색 색감의 레트로함이 돋보인다. 전체적인 배경 자체가 노란 색감이기도 하지만 잘 보면 사진관이나 인물들의 색깔이 연한 베이지 쪽에 가깝기도 하다. 물론 장면마다 극적인 효과를 보이기 위해 지나치게 대조되는 푸른 빛의 색감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빈티지한 필름은 지워지지 않는다. 이는 비단 영화 외적인 조건에서만 보이는 빈티지는 아니다. 만나기 위해 우물쭈물 기다리고, 손편지를 쓰고, 사진을 인화하기 위해 기다리고, 스쿠터를 타고 ... 이런 촌스러움은 영화 전반적인 분위기를 따듯하게 만드는데 한몫한다. 시대가 변함에 따른 추억의 소구일수도 있으나, 당대 느낌으로도 빈티지한 맛을 잘 살렸다고 볼 수 있겠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무작정 다가와 '사랑해'를 연발하며 껴안고 포옹하고 입맞추는 영화는 아니다. 일반적인 멜로 영화의 관습을 따른 듯 하면서도 과감히 내려놓은 연출이 돋보인다. 평범한 사진을 찍지만 사진 안에 의미를 담아내는 사진관 주인 정원의 모습과도 닮아았다. 섬세한 인물묘사가 극의 전반적인 흐름을 좌지우지 한다는 것이 놀랍게 느껴지기도 한다. 과한 것 같지만, 한석규의 심은하의 존재가 영화를 존재하게 했다. 한석규 특유의 슬픈 척 하지 않는 모습이 오히려 영화를 슬픔으로 인도한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안녕이라고 말하는 것 처럼 말이다. 지나가는 일상일 뿐이지만 삶을 소중히 만드는 문체가 고스란히 배우의 입 안에서 담겨져 나온다니, 얼마나 매력적인가.


카페에 앉아 다림을 바라보고, 사진관에 돌아와 앨범을 뒤져보고, 정원은 마침내 영정사진을 찍는다. 눈이 소복히 쌓인 풍경위로 정원은 그렇게 떠난다. 죽음을 받아들인 그의 모습은 초연해보인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그렇게 끝났다. 결말까지의 과정에 어떤 변화도 없이 '마치 그래야 했다는 듯' 당연하게 이어진 전개를 본 관객으로서의 기분은 뭐랄까, 허전함에 가깝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영화임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있을 법한 이야기로 관객의 마음을 울리는 이야기, 이것이 바로 영화의 매력이다. 사랑을 이야기하며 역설적으로 죽음을 드러내고, 죽음 앞에서도 따듯한 사랑을 말하려 했던 멜로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사진을 인화하고, 편지를 전하고, 조심스럽게 감정을 전하고, 기다리고, 침묵하는 … '현대에 다시 이런 영화들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하고 의문점이 드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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