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터의 끄적끄적 15

어느 날, 당신은 문득 빛날 것이다

by 낭만지리 굴비씨


1.


세상에는 저마다의 시간을 가진 것들이 있습니다. 더디 피는 꽃이 있고, 늦게 뜨는 별이 있습니다. 우리네 인생 또한 그렇습니다. 스무 살에는 길이 보일 줄 알았고, 서른에는 무언가 되어 있을 줄 알았으며, 마흔을 앞둔 서른여덟의 저는, 여전히 안개 자욱한 숲을 홀로 걷는 기분이었습니다.


나만 뒤처지는 것 같고, 나의 계절만 멈춰버린 듯한 밤이면, 문득 땅속의 모죽(毛竹)을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남부와 중국 등지에서 자라는 이 대나무는 싹을 틔우기 전 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땅 위로는 아주 작은 잎 하나조차 밀어 올리지 않습니다. 다른 나무들이 푸른 잎을 틔우고 꽃을 피워내는 동안, 모죽이 뿌리내린 대지는 그저 침묵할 뿐입니다.


겉보기엔 그저 실패한 씨앗, 희망 없는 땅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 고요한 시간 동안, 모죽은 땅속 가장 깊은 곳에서 조용히, 그러나 맹렬하게 자신의 뿌리를 수백 평방미터로 넓혀가고 있었습니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가장 위대한 침묵의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


그 깊고 외로운 땅속이 꼭 제 이십 대와 삼십 대의 풍경 같았습니다. 스물여섯, 고지도 연구에 평생을 바치겠다며 호기롭게 도전했던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대학원 시험에서 보기 좋게 낙방의 쓴잔을 마셨습니다. 다행히 길을 열어준 지곡서당(芝谷書堂)에서 『중용』, 『대학』, 『논어』를 통째로 외우고 『맹자』의 절반을 넘겼지만, 3만 5천 자에 달하는 경전 전체를 암송하는 마지막 관문 ‘총강(總講)’을 끝내 넘지 못하고 짐을 쌌던 날, 세상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어 꼬박 일 년을 방 안에서 끙끙 앓았습니다. 스물일곱, 모든 것이 틀렸다고 믿었습니다.


저는 평생을 박복하다 믿었건만 제 주위에는 귀인들이 계셨습니다.


폐인이 되어가던 저를 일으켜 세운 것은 한 사람의 온기였습니다. 같이 서당에서 공부했던 대승이 형이었습니다. 그는 제 손에 세 장의 원서를 쥐여주며, 아까운 공부를 놓지 말라고, 다시 한번 가보라고 등을 떠밀었습니다.


민속학, 고문헌학, 역사학. 아무 생각 없이 손가락으로 집어 든 ‘고문헌학’이 제 남은 생의 길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 후로는 무섭게 공부했습니다. 누구보다 빨리 석사 논문을 썼고, 박사 과정을 수료했습니다. 금방이라도 무언가 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삶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서른둘부터 서른일곱까지,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는 일들이 파도처럼 밀려왔고, 저는 다시 길을 잃은 채 생계를 위해 분투하며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3.


그러다 어느 날 아침, 더는 이렇게 살 수도, 이렇게 죽을 수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침 6시에 일어나 달리자. 다른 것은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오직 그것 하나만 지키자.’ 그리고 매일 아침 달렸습니다. 그 작은 약속 하나가 저를 일으켜 세웠고, 규장각에서 일하며 집안의 빚을 대신 갚아나가는 동안 멈춰 있던 시간을 다시 흐르게 했습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던 서른여덟의 어느 날, 거짓말처럼 합격 소식이 찾아왔습니다. 5년의 침묵을 깨고 6주 만에 수십 미터를 자라나 울창한 숲을 이루는 모죽처럼, 저의 시간도 마침내 온 것이었습니다.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실패하고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던 그 모든 시간, 캄캄한 어둠 속에서 홀로 달리던 그 시간은 결코 멈춤이나 퇴보가 아니었음을. 세상의 어떤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을 가장 단단한 뿌리를 내리는 시간이었습니다.


4.


어쩌면 우리의 삶은 한 덩이 석탄과도 같은 것인지 모릅니다. 검고 투박한 돌덩이는 가늠할 수 없는 시간 동안 세상의 모든 무게를 온몸으로 버텨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깊은 어둠 속에서, 살을 에는 압력과 모든 것을 녹일 듯한 열기를 묵묵히 견뎌냅니다. 그 고통의 시간 속에서도 석탄의 겉모습은 조금도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은 아주 갑자기 찾아옵니다. 모든 압력과 열이 임계점에 달해, 더는 단 1초도 버틸 수 없다고 생각되는 바로 그 찰나. 석탄의 내면에서는 침묵 속의 혁명이 일어납니다. 수억 년을 버텨온 단단한 결속이 순식간에 해체되고, 모든 원자가 눈부신 질서로 재배열됩니다. 점진적인 변화가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한순간의 폭발적인 변태(變態)입니다. 어둠을 삼키며 스스로 빛을 뿜어내는 다이아몬드의 탄생입니다.


5.


괜찮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수없이 무너지는 마음을 다잡으며 버텨온 당신의 모든 시간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차곡차곡 당신 안에 쌓여, 가장 단단하고 투명한 결정체를 빚어낼 신성한 에너지가 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왜 나는 아직 이곳에 머물러 있을까, 자책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지금 가장 눈부신 변화를 앞둔, 마지막 1초를 통과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기다림은 멈춤이 아니라, 가장 높이 솟아오르고 가장 멀리 날아오르기 위한, 가장 깊은 숨고르기입니다.


6.


어느 날 문득, 당신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아침을 맞게 될 것입니다. 어제의 고민이 거짓말처럼 사소하게 느껴지고, 당신을 짓누르던 세상의 무게가 가벼워질 것입니다. 그것은 기적이 아니라, 당신이 온몸으로 살아낸 시간에 대한 가장 정직하고 위대한 응답입니다. 당신이라는 원석은,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가장 찬란한 빛으로 기어이, 스스로를 증명해낼 것입니다.


* 페이스북에서 오늘 어떤 분이 안 좋은 생각을 하시는 글을 보고 마음이 아파왔습니다. 페북에서만 보던 안면도 없는 사이이지만 우리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이 되어 있지 않을까요. 당신의 하루가 시월 중순의 하늘처럼 더없이 창연하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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