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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시] 사찰을 나서며

2020.11.11.

점심마다

같은 절에 간지

석 달이 다 되어 갑니다


그때는 연꽃에도

아직 주홍빛이 있었지요


어느 날

낮은 길목에

들꽃이 피더니

오랫동안 지질 않았고


끝내 시들지언정

색이 바래지 않았는데


일주문을 들어서면

모든 일이

처음으로 리셋되며


어스름한 걸음으로

절을 하여 봅니다


바람이 세 번 부니

이파리가 날리는데


나이 든 비구니 스님은

머리에 수건을 얹고

무심히 내 앞을 지나가는데


대웅전 뒤에는

언제나 응달에


좌측 명부전에는

떡 상자가 수북하고


사십구재를 하려는

가족들은 저 켠으로


낯선 객은 대웅전 안에

홀로 앉아 있었는데


부처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살았습니다


그걸 부정하려던

그런 적도 있었지요


사랑을 떠나려 한

시간도 있었지만


당신은 언제나

미소만 지으시는군요


다만

감사드립니다


돌아 나오는

점심 나절


이파리는

한 번 더 수분을 짜내고선

서걱거리기 시작하는데


멀리서 노스님은

비를 꺼내

쓸기 시작하시고


이 돌개바람 속에서

또다시

돌아서 일주문을 나서면

다시금 현실인데


참 재미나군요

구운몽도 아닌데

말이지요


그저

웃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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