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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몽수 Dec 07. 2019

내 글을 유기한 죄

내 마음을 부탁해

무언가 되기를 소원하는 이들은 생각한다.

무언가 되기 이전과 이후는 크게 다를 거라고.

환골탈태,

깜짝 놀랄 만한 비포 애프터,

인생역전의 드라마,

불행 끝 행복 시작을 꿈꾼다.


그러나 행복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딱 그만큼의 적정거리를 항상 유지한다.

불행 끝 행복 시작, 이런 건 동화 속에만 존재하는 판타지다.

행복 끝 다시 불행 시작, 아니 더 큰 불행 시작.

요요는 다이어트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불행에도 요요가 있는 것 같았다.

적어도 그때 나는 그걸 느꼈다.


첫 장편드라마를 맡은 나는 이전의 나와 달랐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보조 작가 일을 하던 내가 당당히 내 이름을 걸고 드라마를 썼다. 행복 시작.

누구보다 잘 쓸 자신도 있었다.

대본을 미리 많이 써두고 싶었지만, 준비기간이 짧았던 탓에 그럴 수 없었다.

그것도 빨리 쓰면 되니까, 나는 평소 글을 빨리 쓰는 편이니까,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만큼,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넘어,

나는 자만했고 교만했다.

그건 마치 눈을 감고 길을 걷는 것과 같았다. 결국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고 마는 법이다.


기대만큼 시청률이 나오지 않자 매일매일 살얼음판이었다.

여기저기서 나를 흔들기 시작했다.

내가 쓰는 것이 틀렸다고 다시 풀라고 했다.

나는 반발했다.

내 글이 틀린 건 아니라고. 물론 맞는 것도 아니지만, 절대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의 글이 오답으로 여겨지는 것은 누구에게나 치욕이니까.

나는 무너지는 것이 너무 싫었다.

바람이 불면 조금은 흔들려도 된다는 걸 그때는 잘 몰랐다.

치기 어린 객기와 무모한 열정은 뜨거운 반면 그리 이성적이고 합리적이지 않은 탓이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고진감래, 고생 끝에 낙이 오고, 불행 끝에 행복이 온다는 말은

죽을 만큼 힘겨운 시간을 살아내야 하는 우리를 버티게 하려는 누군가의 고약한 거짓말 내지는 감언이설이라는 걸.

불행 끝에 행복 끝에 다시 불행이 도사리고 있음을 나는 예감했다.


내 글이 부정당하자 나의 마음은 천천히 식어버렸다.  

드라마는 아직 절반밖에 가지 못했는데 아무리 쥐어짜도 글이 잘 써지지 않았다.

참담했다. 상처 받고 분노했다.

누군가 분노와 절망은 거꾸로 잡은 칼이라고 했다. 예리한 칼끝이 나를 겨누고 있었다.


더 이상 글을 쓰지 말아야 할 이유는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었다.

가장 쉬운 방법은 포기라는 걸 그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제작진과의 갈등이 극에 달한 어느 날, 결국 마지막 끈을 놓아버렸다.

어쩌면 그건 두려움과 열등의식의 발로였을지 모른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난 작업실을 빠져나왔고, 작가가 교체되었다.

당시의 내 감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잘 기억나지 않지만,

또 기억나면 불편할 것도 같지만,

굳이 기억해내야 할 것 같은 그 감정..

그건 안도감이었다.

아무도 만나지 않아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안도감.

그런데 그건 잠시 잠깐 거쳐가는 감정의 간이역일 뿐 나의 감정은 다시 또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포기한 것에 대해서.

내가 안도감과 맞바꾼 그것에 대해서..

그제야 형체가 느껴졌다.

내가 얻은 것과 잃은 것, 그 무게의 추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극도의 우울함..

곧이어 나를 덮친 건 맥락을 알 수 없는 분노와 억울함이었다.

그리고 버림받았다는 상실감.

내 글을 무책임하게 유기해버렸다는 때늦은 자책까지.

버렸거나 버림받았거나 그건 모두 다 뼈아픈 상처가 되었다.

무언가 되기 이전과 이후는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무언가를 상실한 이전과 이후는 극명히 달랐다.


수시로 밀려드는 여러 감정들이 시간과 함께 흘러갔다. 자연의 순리는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후회할 만큼 후회하고 미워할 만큼 미워하고 울어야 할 만큼 울고 나서야 두 발을 딛고 다시 설 수 있었다.

그만큼 나는 힘들었고 절박했다고, 항변할 수 있었다.

나를 고통 속에 빠뜨리는 것도 그 고통 속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것도 결국은 나 자신이라는 것을 몸소 느꼈다.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한 책임 역시 나에게 있다는 것도.


돌이켜보면 모든 일에 항상 좋기만 한 것도 나쁘기만 한 것도 없었다.

시련을 통해 일상의 가치를 깨닫게 되고,

안 좋은 일이 좋은 일의 시작을 만들기도 하니까.

그리고 분명한 사실 하나,

불행에만 요요가 있는 게 아니었다.

불행 끝 다시 행복 시작,

아니 더 큰 행복 시작.

행복에도 요요가 있다는 걸 알게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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