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사람들은 말한다.
저기에 어디 대본이 있느냐고.
근데, 있다.
예능의 대본은 시청자가 대본이 없다고 느끼도록 쓰는 것이 관건이다.
필요에 따라 간단히 가이드라인만 정리하기도 하고,
시시각각 변하는 현장 상황에 대비해 여러 가지 다른 버전의 대본을 써두기도 한다.
제작 스텝들의 내비게이션이자 서로 간의 약속이 총망라되어있는 글이기 때문에
그때그때 프로그램의 성격에 맞는 형식을 찾아 쓰게 된다.
대학 졸업반 때부터 난 이 대본이라고 부르는 방송글을 쓰며 살아왔다.
시작은 예능이었다.
인턴 작가와 시트콤 구성작가로 2년 가까이 병아리 시절을 거친 뒤,
난생처음 버라이어티 예능프로그램에 들어가 일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내가 가진 능력과 경력에 비해 너무 큰 코너를 담당했고, 책임의 무게는 감당하기 버거웠다.
실수가 실수인 줄도 모르던 시절,
배우고 싶어도 가르쳐주는 이가 없었고,
먼저 가르쳐달라고 할 배짱은 더더욱 없었다.
그래서 그냥 아는 척 연기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냥 눈치껏 일을 했다.
그조차도 열심히 하지 않았다.
그럼 괜히 촌스러워 보일까 봐.
성실한데 무능하다는 소리는 곧 죽어도 듣기 싫은 생초짜, 사회 초년생이었다.
이런 돼먹지 못한 생각을 하면서 오만에 가까운 허세가 나를 좀 더 강하게 만들어줄 거라고 믿었다.
그게 최선이라고 여길 만큼 나는 어렸고 미성숙했다.
선망하던 방송작가가 되었고, 누구나 아는 공중파 간판 예능프로그램에서 일했지만,
그곳은 늘 내게 춥고 척박했다.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었는데 예능작가는 '글도' 잘 쓰는 만능을 원하는 것 같았다.
트렌디한 감성과 세련된 글빨은 필수,
사교적인 성격과 성실함, 그리고 체력까지 갖춰야 하는 정말이지 고된 업무였다.
촬영이 끝나면 그저 이면지로나 쓰이고 마는 나의 대본이 마치 나 자신을 보는 냥 허무하다 못해 초라했다.
밖에서는 꽤 그럴듯해 보였다.
tv에서나 보는 유명 연예인들과 함께 일한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그것만 보고 뛰어들면 바로 익사하고 마는 것이다.
두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아 물속에서 허우적대며 나는 여러 계절을 흘려보냈다.
여러 겹의 가면을 쓰고 두려움을 감추며.
하지만 다 속여도 나 자신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내가 나를 아는데 속여봤자 오래 못 가는 게 당연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면서 뛰는 척을 했으니 넘어지는 것도 당연했다.
자존감이 바닥나고 지칠 대로 지친 나는 결국 도망쳤다.
수없이 길을 잃고 헤맸다.
그리고 마침내 나의 오랜 꿈과 만났다.
드라마 작가..
되기도 힘들고,
되고 나서도 손에 꼽히는 특급 작가들만 살아남는,
정글 같이 치열한 생존 전쟁을 치러야 하는 드라마 작가..
모든 희로애락이 드라마 하나에 저당 잡혀 좌지우지되고,
균형을 잡지 못해 언제나 불안하고 위태로운 삶.
하필이면 왜 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었을까?
그럴듯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사실 특별한 이유가 없다.
우리가 사는 데 특별한 이유가 없듯,
모든 일에 다 이유가 있어야 할 필요도 없듯,
존재하니까 존재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난 이 길 위에서 여전히 헤매고 있다.
또 다른 나를 찾기 위해,
나의 삶을 가치 있게 해 줄 무언가를 찾기 위해 애쓰고 있다.
더 이상 도망치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더 절실히 도망치면서..
내 인생인데, 온전히 나의 것인데,
전혀 내 것이 아닌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하루라도 빨리 거기서 빠져나와야 한다.
도망치는 건 분명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아닌 나로 살아가는 것이 그보다 덜 부끄러운 일도 아닐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