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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몽수 Nov 13. 2019

감정이 결핍된 인간


오랫동안 준비한 드라마가 방송사의 외면을 받자 하루하루가 지루해졌다.

매일 붙잡고 있던 대본을 손에서 놓자 갑자기 엄청난 시간들이 일제히 나를 공격해왔다.

또 무언가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실감으로부터 나를 지켜내기 위해서.

늘 그랬듯 패턴처럼 스스로를 조련했다.

나의 감정들은 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또다시 글을 쓰며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에 대해 생각했다.

고난에 처한 인물들의 감정에 대해 천천히 더듬어 들어갔다.

그들의 아픔과 슬픔에 대해 생각했다.

드라마를 쓸 때 가장 어려운 것 중에 하나가 인물들의 감정 묘사다.

상황에 따른 인물들의 감정 상태를 작가는 무엇으로든 표현해주어야 한다.

대사로든 행동으로든, 쉽고 깔끔하게, 되도록 참신한 해석으로.

가령 슬픈 상황인데 오히려 박장대소하며 춤추는 인물이라든가,

기쁜 상황인데 대성통곡하는 인물이라든가,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들어 호기심을 유발하기도 한다.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상황에 대해서는 간접 경험과 상상력이 동원된다.

가능한 인간의 감정을 끝까지 파고들어야 진정성 있는 좋은 작품이 된다.

한참 나의 드라마 속 인물들의 감정을 들여다보던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라는 인간의 감정은 어떤 걸까? 지금 내 상태는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물론 현실은 드라마와 다르지만 인간의 감정이라는 면에서는 크게 차이가 없다.

근데 뭔가 많이 잘못된 것 같았다.

힘이 든 건지, 아픈 건지 슬픈 건지, 정말 아무렇지 않은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제야 분명히 알게 되었다.

잘못됐다는 걸.

지금 이대로라면,

나는 감정이 결핍된 인간이었다.


그때부터 드라마가 아닌 나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억눌리고 은폐된 감정들이 무엇인지 똑바로 보기 위해

숨겨놓은 아프고 괴로운 기억까지 하나하나 내 앞으로 소환했다.

슬픔과 분노 등의 감정들로 수시로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했다.

감정이 뒤죽박죽 나를 붙잡고 뒤흔들었다.

동시에 깨알 같은 글씨로 가득 찬 몹시 두꺼운 책을 눈 앞에 둔 기분이었다.

멀미가 났다. 그렇다고 간단히 덮고 싶지는 않았다.

분철을 해서라도 이번만큼은 오롯이 나에게 집중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어디든 떠나보기로 했다.

패턴화 된 나의 감정들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문을 열고 나가기로 했다.

난생처음 혼자 여행을 떠났다.

제주도였다. 시작부터 끝까지 철저히 혼자였다.

솔직히 처음이라는 감정이 주는 설렘보다 두려움이 더 컸다.

하지만 그래서 해야 했다. 그동안 그 두려움이 내 안의 감정들을 바로 보지 못하고 회피한 이유였으니까.


몇 군데 숙소만 잡고 따로 해야 할 것을 만들지 않았다.

그때그때 내 감정에 충실하기로 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아무 생각도 안 하고,

몇 시간이고 멍하니 앉아 바다만 바라보기도 했다.

잔잔한 바다에 밀려오는 파도처럼 내 마음이 천천히 나에게 밀려와 닿았다.  

천천히, 갑작스럽지 않게, 자연스럽게, 하나하나 내 안에서 흐르는 것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집중했다.

그동안 줄곧 외면해왔던, 상실감에서 잉태된 여러 감정들이 파도처럼 넘실댔다.

그제야 내면의 소리가 차례로 들려왔다.

너무 가까워 깨닫지 못했던 이야기. 때때로 무심코 지나쳐버린 이야기.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절대 들을 수 없는 내 안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그동안 나는 감정의 부피가 너무 커질까 두려워 되도록 절제하고, 상당 부분 덜어내려 애를 썼다.

그런데 감정은 너무나 정직하게 불행을 덜어낸 만큼 행복의 양도 덜어내 버렸다.

파도를 허락하는 만큼 바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듯,

불행을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삶의 행복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바다가 알려주었다.


때론 타인뿐 아니라 나와의 소통이 필요하다.

타인을 향한 관심과 애정을 공감과 경청으로 표현하듯 나에게도 그래야 한다는 걸 알았다.

내 안에 완벽한 타인이 살고있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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