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단순노동자인가

참을 수 없는 PPT의 가... 무거움?

by 굶찮니

모름지기 한국어 교사라면 마치 숨을 쉬듯 자료를 만들어 내야 하는 것 같다.

이것은 수많은 직장인들이 보고서와 한몸이 되는 물아일체의 경지에 이르는 것과 매한가지일 것이다.

교재가 바뀔 때마다, 맡은 급이 달라질 때마다 평일 저녁과 주말의 일부를 PPT와 씨름하는 내 자신을 보면서 나는 점점 정신이 아득해지고, 끝나지 않는 PPT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만 같다.




PPT 지옥.

나는 대학 시절에 두세 주에 한 번씩 PPT의 첩첩산중을 넘어오곤 했다. 교수님은 사악한 웃음을 뒤로 애써 크큭, 크크큭하며 감춘 채 산행 코스를 설명해주시곤 했다.


"이번에 입산할 곳은 만만치 않다구 Boy~♪."


어떻게든 돋보이기 위해서 파워포인트의 신기능과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Prezi에도 손을 대면서 나는 차근차근 프레젠테이션이 무엇인지 깨닫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금씩 내 몸 안에 마나가 달리기 시작했고, 나는 4학년 마지막 수업에 발표 직전 기쁨의 한마디를 던지고 발표를 했다.


"오늘이 제가 학교 다니면서 하게 될 마지막 PPT 발표일 것 같 ㅋ크큭 크킄 입니다."


뭐, 그때까지만 해도 대학원에 갈 생각은 없었다. 기필코 없었다. 찌발.




학부 때의 PPT는 온갖 잡기와 신기술을 접목한 기술의 대 향연이었다면, 대학원에서의 PPT는 몇 없는 발표에서 "제가 얼마나 미천한 등신인지 보여드리겠습니다!"라며 상소문을 올리듯 하는 석고대죄의 수단이었다. 그러면 수많은 선배들과 교수님들이 "너의 무지함을 사하노라."라며 발표 때 난도질당한 상처에 뒤풀이 소주로 채워주는 그러한 과정이 계속되었다. 솔직히 기술을 쓸 겨를도 없다. 그냥 이론적으로 까이면 끝이고, PPT는 신경도 잘 안 쓰는 것 같았다. 발제문. 그것이 팔 구할일지어니.


그렇기에 PPT다운 PPT는 사실상 학부 때까지가 마지막이었고, 대학원 때는 PPT를 손으로 썼는지 손톱으로 찍어냈는지도 기억이 안 나기 때문에 나는 앞으로 평생 발표따위는 안 하고 살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놈의 직업은 매일이 발표다.


아니, 그 이상이다 싶다. 나는 발표자가 되기도 하고 사회자가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작은 TV쇼의 MC라도 된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한국어교육 실습 때부터 내 적성에 맞나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일하면서도. 워낙 태생이 내성적이라 그런지, 아무리 성격을 개조해도 그 내성적 근성이 남아있던 탓에 항상 실수를 두려워하고 과감하지 않다 보니 수업을 하고 나서도 항상 아쉬움이 남았다.


장점이라면, 실수를 안 하려다 보니 문제가 될 만한 사건들을 수많은 회피기로 싹싹 피해왔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기특해~


문제는 PPT이다. 나는 오늘도 속깊은 곳으로부터 서서히 올라오는 빡침을 억누르며 투덜대고 있었다.


'하아, 싯털 언제까지 이런 반복 작업을 해야 하는 것인가. 인간은 왜 사는가. 콧털은 왜 자꾸 자라는가.'


나는 오전께만 해도 나 스스로를 '단순노동자'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매번 같은 패턴으로 1과부터 끝까지 PPT를 찍어내야 하는 기계. 그러다 문득, 개 백수시절에 나의 마음가짐을 다시 생각해 봤다. 엊그제, 요즘 일을 쉬고 있는 친구녀석을 만나고 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녀석에게 '하아, 오늘 되다 되'하며 힘들다고 호소했다가, '그래도 네가 행복해 보여서 좋아.'라며 마치 떠나간 연인에게 편지 쓰는 듯한 멘트를 듣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래 백수 때야 뭐든 하고 싶은 것이다. 일도 하고 싶고, 뭐라도 쓰고 싶고.

그러다가 일하고 있을 때는 미친듯이 그냥 누워있고만 싶고. 이불 밖으로 1cm조차 나가고 싶지 않고.


그가 말했다. '똥간 들어갈 때 생각과 나온 생각이 참 다르지. 이 싯푸럴 놈아.'


나는 도망치듯 그에게서 떨어져 그날 저녁에도 PPT를 만들었다.




나는 단순노동자인가. 나는 PPT에 나만의 회심의 드립을 넣으려던 차에 고민하기 시작했다. PPT만큼 종합예술적인 것이 또 있을까 싶었다. 물론 패턴이야 매번 비슷하지만, 여기에는 나만의 애니메이션 효과가 있고, 사진도 내 마음대로 넣을 수가 있고, 내 방식대로 구성을 해야만 한다. 반복적이면서도 창조적이어야 한다.


그렇게 나는 다시금 행복해지기는 개뿔, 더욱 혼란스러웠다. 생각보다 빡세구나.


그렇기에 나는 동종 업계에서 일하는 선생님들, 특히나 같은 한국어교육 종사자분들 중에서도 PPT 참 잘하는 집은 정말이지 리스펙트하고야 마는 것이다.


사실 교육원마다 다르지만 보통은 통합 교안이 있고, 통합 PPT까지 제공하는 곳이 많다. 없는 경우에는 고스란히 1과 첫머리부터 마지막까지 스스로 제작해야 하고, 통합 PPT에도 부족함이 느껴지면 본인이 슬라이드를 추가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어떤 곳에서는 수정 및 추가 없이 제공된 PPT 그대로 해야 하는 곳도 있다.


캐바캐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PPT와 뗄래야 뗄 수 없는 환경에서 계속해서 만들고, 수정하고, 들어 엎고, 다시 만들곤 한다. 졸면서 만들다가 다음 날 수업시간에 애니메이션이 꼬여서 정답이 먼저 갑툭튀하고 문항이 나중에 나오기라도 하면 저녁에 또 한번 이불킥을 팡팡하고 차고 마는 것이다.


또, 1과 PPT에 너무 힘을 준 나머지 2과에서 막막해지는 경우도 예전에는 있었다. 마치 LOL 처음할 때 콤보 따윈 없이 적이 보이자마자 궁부터 박은 다음에 '허헝, 싯털 왜 안 죽징? 다음엔 뭐하징?'하다가 갱킹에 두들겨 맞고 죽기 5초 전 느낌이다. 1과가 너무 화려하고 2과에서 후줄근하면 아무리 학생들이라 하더라도 저 선생 일하기 싫은가 부다를 대번에 알겠지. 그래서 또 2과에서 밤새고, 3과부터 남몰래 레이어를 조금씩 빼면서 한 학기 전체를 고통스럽게 보낸 기억도 떠올랐다.


지금이야 이 직업을 택한 것에 후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PPT는 아직도 질색이다. 워낙 손재주도 없고 내가 만들었지만 참 못났다고 생각하는 슬라이드를 볼 때마다 진이 빠지기도 한다. 처음에는 악필인 것을 조금이나마 커버하면서 이해를 돕기 위해서 PPT를 적극 활용했는데, 이제는 판서 비중이 커졌다. 그것도 교안 자체가 빡빡하면 시간을 아끼기 위해 전날 미친듯이 슬라이드를 채워 커버해야 하기 때문에 매번 그러기도 쉽지 않다.


그래도 제일 감사한 것은 아무런 기기 결함없이 그지같은 PPT라도 보여주면서 수업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강의하는 사람 입장에서 기기결함만큼 무서운 호환마마도 없다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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