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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굶찮니 Apr 09. 2023

적성에 안 맞아서 때려칠랍니다

적성은 재능일까 착각일까

나는 대학교를 '적성평가'로 갔다. 

수능을 겁나게 국밥 말아먹듯 시원하게 해 먹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적성평가 소위 '적평'문제들은 아이큐 테스트 느낌의 문제가 수리, 언어, 공감각 등의 두세 파트로 나누어져 나왔다. 


시험을 준비하면서도 뭘 준비해야 하는지도 몰랐고, 이게 왜 '적성'을 평가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 애초에 '적성'이라는 것을 평가가 가능한 것인가? 이런 의문만 들 뿐이었다. 공부해서 시험을 보는 것에 익숙한 나는 무언가에 '잘 맞고 안 맞고'를 시험보는 것이 뭔가 사이즈 다른 레고 블럭을 억지로 껴 맞추는 느낌이 들어서 모의고사 문제를 풀면서도 내내 찜찜했다. 


뭐, 편집증 걸린 것처럼 세세하게 따지지만 않는다면 뭔들 괜찮지 않겠나 싶다. 어차피 이 적평이라는 것도 대학교에서 뽑으려는 여러 거름망 중의 하나일 뿐이니까. 


대학교에 들어가는 것 자체에도 '적성'이라는 단어는 늘 따라왔지만 오롯이 '내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그때 당시 내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담임 선생님은 늘 교단 앞에서는 "적성에 맞는 진로를 선택하라." 이렇게 말씀하셨더랬지만, 일대일로 내 부끄러운 내신과 처참한 모의고사 성적표를 펼쳐놓고 상담을 하자면 '적성'은 후순위도 아니고 어느 순간 스르륵 형체도 없이 사라진 채 상담이 진행되곤 했다. 


그래도 나는 고집대로 내 적성에 맞다고 '생각했던' 국문과에 진학하게 된다. 

그리고 당시 아집대로 점수에 맞춰 온 동기들의 일부를 혼자 속으로 디스(diss)했다. '불쌍한 애들, 어떻게 좋아하는 것을 좇지 않고 여기와서 헛질일까.' 


그리고 나는 머지않은 미래에 내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게 되었다. 3학년(死亡年이라 발음한다더라)이 되니 뭔가 뒤쳐지는 내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고 초조하며, 비로소 死학년이 되자 내 처지가 불쌍해지더라. 나는 내가 노력해서 안 된 것 + 애초에 길을 잘못 들었구나. 오호 통재라. 이미 뜻있는 아해들은 코딩이니 전과니 졸업 유예니 하며 온갖 살길을 강구해나갔고, 나는 그 난리통에 혼자 패닉이 와 아무것도 안 하게 되었다. 


사실 나는 4학년 때도 낭만을 원했다. 하고 싶은 소설 비평을 하고, 소설 창작을 하고, 그것이 제일 잘하는 '적성에 맞는 일'이라고 착각하며 살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나는 '적성'이라는 단어를 머릿속에 지우고 살았다. 어차피 쓸 일도 없었다. 주변에 수험생을 직접 만날 일도 없었고, 후배들은 알아서 살 길을 잘 찾아가서 조언은 필요없었다. 


'적성'을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또태국'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지 1년째 접어들 무렵이었다. 늘어지는 도시 분위기에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고, 늘어나지 않는 통장 잔고를 보며 먼 타국에서 이게 뭔짓인가 싶어 현타가 하루에도 수백 번씩 들이쳤다. 그런데 이런 것보다도 이 일에 내가 적성에 맞는 것인가 싶을 자잘한 실수와 상황들이 올 때마다 남모를 좌절을 느낀 것이 제일 힘들었다. 


사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정말 하찮은 고민이다. 나는 잘하든 못하든 특정 부분에서는 강의머신이 되어버렸다. 처음부터 잘해서 기계가 된 것이 아니라, '하다 보니까' 감정없는 로봇이 되어버렸다. 그렇다고 아직 열정이 팍 식어버린 것은 아니지만, 머지않아 그것마저도 식을 날이 올지도 모른다. 


예전 같으면 어떤 문제가 닥쳤을 때 적성 탓을 하곤 했다. '역시 이걸 하는 게 아니었나 봐.', '나 이거 때려칠까 봐.'라며 친구들에게 하소연한 적도 종종 있었다. 동료 선생님에게도 그런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다고 당장에 하루아침에 때려칠 깡도 없었고, 그렇게 늘 하던 것을 조금씩 업그레이드하면서 버텼다. 


요즘은 사실 늘 이런 마인드다. "빨리하고 쉬자."


가장 효율적으로 끝낼 생각으로 머리와 손가락을 풀가동시킨 뒤에 냅다 누워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을 즐긴다. 나는 태생이 게으르다. 어쩌면 '게으름'이 내 적성에 맞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최근에는 직장이 바뀌어 정말 새롭게 맡게 된 일도 더러 있는데, 이건 적성 이런 게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빨리 일을 파악하고 끝낼 생각하기에도 수 초가 아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따금 후배들을 만나면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서 하라'고 조언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이게 실전에서 먹힐 조언인지는 모르겠다. 아무리 지금 단계에서 '적성'이라는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는 단계가 오고, 그러면 너는 훠킹 썪잇해야 할 것이라고 말해봤자 꼰대 소릴 듣기밖에 더 하겠나 싶다. 와 닿지도 않을 테고.


예전에 타지에서 생활할 때 똑같이 한국에선 먼곳에서 카페 일만 주구장창하다 유튜브를 시작한 어떤 양반의 영상을 보고 감명을 받은 적이 있었다. 행복하고 추억을 바라는 것보다는 주 7일 알차게 일해서 겁나게 돈을 모으라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다. 그 양반이 적성을 강조했는지 어땠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하지만 그 사고방식 자체에 적성을 고려하는 따뜻함은 없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 굶어 죽는 것은 예술계에서 예전부터 종종해오는 말이다. 영화계도 극소수만 잘 나가고 대부분은 무명으로 몇 년을 꿇거나 이름 모를 스태프로 커리어가 끝난다고 한다. 가수도 그렇고, 심지어 순수문학인 국문과도 별명이 '굶는과'였으니 말 다했다. 냉혹한 얘기지만 관련 전공을 안 한 사람들이 더 잘나가는 경우도 종종 있고, 또 그러다 보면 적성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볼 수가 있다. '나는 과연 적성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착각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사실 적성이라는 것이 있는 건가.


반대로 일반 직장은 꼭 적성이 맞아야만 일을 잘할 수 있는 것일까? 그 판에도 과연 적성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오히려 '근성'이라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어떤 문제가 와도 꿋꿋하게 일을 처리해 나가는 근성. 하지만 우직함과는 또 다르다. 근성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은 자칫 우둔함으로 빠질 수 있으니 접근성이 좋은, '적성+근성=적근성'이라 해 두자. 이른바, 내가 '근성'을 발휘하기에 잘 맞는 직업과 업무인가.


재능은 솔직히 부정을 못하겠다. 한번도 배우지 않았는데 금방금방 무언가를 빨리 배우는 사람들은 참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능=적성'으로 보기에는 또 무리가 있다. 잘하다가 금방 흥미를 잃거나 지속성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참 많으니까. 학생 중에 그런 애들이 많다. 정말 유창하게 한국어를 하지만 어느 일정 수준을 넘어서질 못하고 만년 2~3급에 머무는 친구들이 그렇다. 좋은 의미로는 언어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이고 재능도 있다고 본다. 하지만 적성, 아니 '적근성'은 없다. 


나도 어릴 때는 제법 새로운 것을 금방 배우고 일정 수준까지는 잘 따라하는 '재능'이 있었다. 그 중에서 '적근성'까지 맞아 떨어지는 분야가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부모님은, 아니 비단 내 부모님말고도 어느 부모님이라도 그것을 알아보는 안목이 있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으니까. 잘못하다 애 잡는 경우도 적지 않게 봤다. 


솔직히 사회에서 적성을 찾는 것은 너무나 낭만적이 아닌가. 결과물 뽑아내기 바쁘고, 시스템 잘 굴러가게 할 능력이 당장 필요한 직장에서 '저는 이 일이 적성에 안 맞아서요.'라고 말하기에 너무 민망한 환경이다. 사회는 적근성을 요한다. 문제가 닥치면 당장 해결할 인재가 필요하겠지. 회피하는 로맨티스트들은 이미 세상에 차고 찼으니까.


낭만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에는 내 자신이 너무 슬프고 애닯다. 나는 내 일을 하면서도 낭만과 그놈의 '적성'을 놓치기 싫어, 아직도 '적성'이라는 것이 있다고 착각해서 이렇게 글을 쓰고 있으니까. 언젠가 이 일이 본업이 되어 글쓰는 것조차도 '적근성'이 있나 없나를 따지게 되는 날이 되면 나는 또 같은 고민을 하면서 때려칠 궁리나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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