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말하기 시험

기상천외한 그들만의 한국어

by 굶찮니

외국인 학생들은 말하기에 자신이 있든 없든 '말하기 시험'이라고 하면 다들 치를 떤다.


"다음 주는 여러분이 진짜, 진짜, 진짜 좋아하는... 말하기 시험이에요!"

"아아~ 안 돼요. 못해요."


시험 때만 되면 없던 유사 새디즘과 같은 모뗀 아드레날린이 뿜뿜거리는 나로써는 실제로 저런 저질 멘트를 내뱉는다. 실제로 기분이 좋기 때문이다. 이것들아, 그렇게 수업 시간에 대답 안 하더니 쌤통이다! 시험을 빌미로라도 네놈들의 입을 열게 만들 것이야! 으하하하하하.


흡사 빌런처럼 음흉하게 미소를 지으면 아이들은 길게 말하기 주제부터 부랴부랴 확인한다. 배점이 높은 이 주제 말하기부터 달달 외우고, 문법은 운빨 메타로 요행을 바라는 실로 영리한 플레이다.


사실 표현 영역(말하기, 쓰기)가 가장 가르치기도 까다롭고, 채점에도 시간과 공이 많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영역이 이들의 창의력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1. '이에요'무새


1급에서는 웬만해서는 유창성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가르쳐 준 문법을 정확하게만이라도 말해주면 정말 감사할 따름이다. 거기에 발음까지 정확하다면 달달한 마카롱이나 사탕이라도 하나 쥐어주고 싶을 정도다.


학교마다 문법이 조금씩 상이하지만 1급이어도 상당한 어미표현을 배운다. 기본적으로 '-아/어요, -ㅂ니다/습니다'부터 명령형 '-(으)세요', 청유형 '-(으)ㄹ까요?', '-ㅂ시다/읍시다', 부정형 '-지 않다, 안~, 못~' 금지 표현 '-지 말다', '(으)면 안 되다' 등등 정말 다양하다.

이 모든 것을 명사와 결합하는 이른바 '이에요'빌런을 만난 적이 있었다. 나는 처음이라 긴장해서 그런 줄 알았다.


"이번 방학에 뭐 해요?"

"저는 어... 고향 가다... 이에요."


"(조금 당황) 한국어가 어때요?"

"어렵지만이에요."


"(조금 더 당황) 취미가 뭐예요?"

"저는 취미이에요."


이 학생은 본인의 존재가 곧 '취미'라며 마치 삼위일체설을 설파하듯 당당하게 시험이 끝날 때까지 거의 모든 문항에 '이에요'를 결합하고는 천진난만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오, 주여. 성령이시여. 취미이시여.




2. 쌤, 저 잘했쬬?



문법 '-지만'은 형용사 또는 동사와 결합하여 앞과 뒤의 내용이 반대됨을 나타낸다. 하지만 그 뒷내용을 정말 궁금하게 만드는, 마치 스포일러는 절대 용납 못하겠다는듯 당당한 학생이 있었다.


앞서 보여준 것처럼, 보통 시험은 배운 문법을 보여주고 그것을 사용해서 교사의 질문에 대답하는 방식이 있다. 해당 문항은 '-지만'을 사용해서 대답하는 문항이었다. 그런데...


"떡볶이가 어때요?"

"떡볶이가 맵지만."


나는 이 시점에서 얘가 뒤에 어떻게 말할지 생각하는 줄 알았다. 보통 뒷내용을 생각하다가 엉뚱하게 대답하는 경우도 많으니까. 여기에서 좀 오래 기다려주는 선생님도 있고, "몰라요?"하고 칼 같이 자르는 선생님도 있지만 나는 전자 쪽에 가까웠다. 나는 눈을 마주치며 기다렸는데... 이 친구는 다 대답했다는 듯이 질문도 안 했는데 다음 그림을 보면서 말을 하려고 했다.


"아니, 아니, 떡볶이가 어때요?"

"(파워 당당) 떡볶이가 맵지만!"

"(뒤에 더 말해야 한다고 재스쳐를 섞으며) 맵지만~?"

"(뭐 이자식아, 다 말했잖아 눈빛) ???"


이 친구는 해당 문항 서너 개를 다 '-지만'으로 끝내버렸다. 발음도 완벽했다. 그리고 본인도 뭔가 만족스러운듯이 표정이 밝았다. 나는 속으로 펑펑울며 최하점을 주고 말았다.

얘는 심지어 한번 1급을 유급했는데, 아니다. 왜 유급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3.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 다 섞어 준비해봤어요!


보통 예상되는 오답은 문법을 잘못 쓰거나, 아예 모르거나, 잘 썼지만 시제나 단어가 틀리는 등의 경우다. 그런데 가끔 정말 너무 열심히 해서 입력 과부하가 걸린 친구가 찾아온다. 솔직히 채점하면서 이런 친구들이 제일 안타깝다. 분명 공부는 했는데, 어수선하게 뭔가를 더 첨가해서 감점이 되는 경우다. 가령,


"어쩌다가 사고가 났어요?"


내가 원하는 '-는 바람에'를 사용한 대답이었다. 그런데 긴장한 이 친구, 평소에도 수업 태도 참 좋고 잘 말하던 이 친구가 그만, 고장이 나버렸다.


"어, 그... 신호가 아니, 신호를 안 지켰는데, 안 지켜 가지고, 그래서 차가 부딪쳤었는데, 차가 부딪치지 말걸 그랬어요. 그런데, 미끄러져 아니, 선생님! 다시! 다시해요. 차가 미끄러지는 바람에 사고나 가지고, 병원에 가야겠어요."


흡사 실제로 사고 현장을 목격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패닉이 온 이런 친구는 일단 진정을 시키고 진행하기는 한다. 하지만 한번 긴장이 쑥 올라온 학생을 진정시키기는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앞에 있는 시험감독관의 존재 자체가 개부담이기 때문이다. 다음 수업 시간에 '청심환'이라는 단어를 어떻게든 수업에 녹여 알려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4. 뭐 어쩌라고


나로써는 아니, 다른 선생님들도 전혀 이해를 못하는 눈치기는 한데, 시험을 아예 안 보는 친구들도 있다. 이유를 물어보면 비슷비슷한데, 이번에는 수료를 못할 것 같아서 시험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나는 시험삼아 한번 보는 게 어떻냐고 말하지만 고집이 황소 뺨싸다구를 후려 갈길 정도다. 그래서 와서 출석만 하고 바로 런을 하는 친구들이 종종 있다.


또 어떤 학생은 기껏 와서 거의 한 마디도 하지 않고 가는 경우도 있다. 물론 하고 싶어도 못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어떤 친구는 계속 내 눈만 말똥말똥 쳐다보기만 하는 경우도 있다. 약간 목욕 싫어하는 고양이한테 억지로 샤워기 들이대서 씻겨놨더니 '아옹! 아옹!'거리면서 원망스럽게 쳐다보는 그런 느낌이다.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데 하는 표정인데, 그럼 시X 너는 대체 나한테 왜이러는데... 하는 상상이 들게 만드는 상황이다. 이럴 때는 일부러 시험을 드랍하는 친구들이 고맙기도 하다.




5. 외운대로 했잖아요


주제 말하기의 경우는 외우기만하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있다. 그래서 채점 기준만을 노려서 달달 외우고, 앞선 문법 말하기 단답형은 다 말아먹는 친구들이 있는데, 어차피 이러한 것을 감안해 웬만하면 다 채점기준에 이런 감점 요소들이 들어가 있다. 자세히는 말 못 한다. 어차피 감점하게 되어 있다.


설사 티 안 나게 완벽하게 말했다고 해도 배점 자체에 균형을 두었기 때문에 앞선 부분의 유형을 무시하면 진급이 어렵게 설정해 놓았다. 수행 평가가 있는 것도 그 이유 중에 하나이고. 결국 본인이 100% 이해하고 활용해야만 진급이 용이하다. 가끔 비정상적으로 다른 항목 점수가 높아 진급하는 돌연변이도 출현하기도 하지만 역시 드물다.


그래서 가끔 말하기 시험을 잘 봤다고 생각했는데 점수가 낮다고 불평하는 친구들이 있다. 어쩔 수 없다. 뜻도 모르고 그냥 외워봤자 자기 것이 아니니까...


1급에 어떤 친구는 유급생이었는데, 상담 때 한국어를 전혀 이해 못해서 어쩔 수 없이 번역기로 상담을 진행했다. 그 친구는 한글은 곧잘 읽었지만 정말 간단한 문장조차 말할 수 없었다. 그래도 드릴 연습만큼은 누구보다 빨리 끝내는 친구였다. 걱정됐다.


시험 때도 역시 외운 티가 났다. 본인은 모든 문항에 대답했지만 그게 다 정답이 되지는 않았다. 시험이 끝나고 천진난만하게 자기 잘 봤냐고 물어봤는데, 내 대답은 '글쎄요.'였다. 그 친구는 '글쎄요.'라는 말도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싱글벙글 웃으며 멀어지는 그 학생을 보며 지필이라도 잘 보라며 축복해주었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말하기 시험에 임하는 선생님들에게 경외의 박수를 보낸다. 지금이야 생각나는대로 아무 사례나 가지고 왔지만, 훨씬 기상천외한 경우도 있으니까 말이다. 얼마 전부터 토픽(TOPIK)에 말하기 시험이 추가되어 시범 운영하고 본격 운영에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하기 시험은 다른 시험과는 또 다르게 채점이 까다롭고, 그만큼 인력이 많이 들어갈 텐데... 그걸 시행을 하다니...

수많은 창의력 대장 답안들과 싸워야 하는 해당 관계자 선생님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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