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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굶찮니 Oct 22. 2023

휴대폰과 친하면 공부 못한다

외국인 학생들이 한국어 실력이 안 느는 이유

신기한 세상이다. 요즘은 사진만 찍어도 검색이 된다더라. 

선물 받거나 선물을 할 와인이 좋은지 비싼지 판단하려면 라벨만 찍으면 되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미술관에 끌려갔을 때, 처음 보는 공간에서 미술 작품을 보면 사진찍어서 이미지 검색도 가능하다. 그리곤 유식한 척을 할 수가 있다. 음... 이건 마네모네하네마네의 '아마도 난 잘 몰라'라는 작품이야. 조선시대 대표작이지. 


최근 몇 년간 선생님들을 괴롭히는 것은 '텍스트 인식 번역' 기능일 것이다. 사실 나는 태국에 있을 적에 이 기능의 덕을 유용하게 본 적이 있었다. 학교에서 보는 공문은 99% 확률로 태국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같은 과 태국인 선생님이 자리에 안 계시면(혹은 계셔도 내용 자체가 복잡해서 설명을 못 알아 먹을 때도 있다.) 나 혼자 번역기 돌려가며 내용을 유추해내야 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그때는 이 텍스트 인식 번역이 완벽하진 않았다. 하루는 빨래 세제를 사야 했는데 어느 게 세제인지 섬유유연제인지 도통 몰라서 사진을 찍었더니, "완벽하다, 향기, 깔끔하다" 이런 것만 나오고 도무지 정체를 알려주지 않아 섬유유연제만 두 개 산 적도 있었다. 물론 이때는 태국어도 안 돼서 손짓 발짓해 가며 바꿔오긴 했다만...




사실 나의 적은 '구글링'과 '블로그', '나무위키'밖에 없었다. 한국어 교사로 일하기 직전, 글쓰기 센터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1학년 교양 과목 과제 첨삭을 한 적이 있었다. 단과대마다 스타일이 참 다양해서 정말 재미있었다. 분명 같은 주제로 과제가 나가는데 관점이 제각기 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를 빡치게 하는 것은 카피캣들이었다. 


첫 문단 서론은 대체로 '정의'가 들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는 나무위키나 위키백과가 입주한다. 3층에 이 양반들이 이사가 끝나면 2층 본론에는 곧이어 블로그 형님이 이사 온다. 끝에 1층 결론은 각자 다른데 그대로 블로그 형님 사촌이 들어오거나 글쓴이가 스스로 플라톤 내지 소크라테스 같은 대학자가 되어 대단원을 마친다. 이것조차 귀찮은 학생들은 글의 80%를, 그러니까 1~3층을 통째로 블로그에 전세를 내준다. 


그래서 나는 석사논문 본심사 때 나를 개패듯이 잡아댔던 '카피킬러' 프로그램과 동맹을 맺고 베낀 친구들을 색출해 낸 다음 해당 강의 교수님께 일름보를 시전한다. "교수님! 이 놈이에요, 이 놈!" 어제의 적은 오늘의 아군이렸다. 나는 카피킬러와 하이파이브를 하며 PC를 끄고 퇴근을 했다. 


태국으로 넘어가서 강의를 할 때부터 번역기들이 나를 스멀스멀 괴롭히기 시작했다. 한 학기에 1~2개 정도의 쓰기 수업을 맡곤 했는데, 매 주 40~50여 개의 쓰기 과제를 보는 것 자체로도 곤욕이기는 했다. 하지만 본인 자력으로 쓴 것이 아니라 번역기임이 확실한 글들을 보면 힘이 빠지곤 했다. 이미 연구원 시절 외국인 학생들 글도 첨삭해 봤고 당시 선배들에게 그런 글들을 가려내는 노하우도 조금 배웠기 때문에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아이들 글을 첨삭하고 있자면 내가 구글 번역기를 잡아내는 것인지 내가 역번역기가 되는 것인지 호접몽 물아일체가 시X럴 이런 것이군요, 장자시여 제기랄 하며 빨간 펜을 내던지기를 반복했다. 


그래도 쓰기 상담할 때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의 한스 란다처럼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한국어 공부의 적을 숨겼다는 것을 압니다. 여기에 번역기를 돌린 곳이 있지요?"


(눈물을 흘리며 끄덕)


"그곳을 조용히 손으로 가리키시오."


(떨리는 손으로 문장을 가리킨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다 점점 사진을 찍어가며 1초만에 번역이 가능한 기술을 쓰는 학생이 점점 늘어났다. 국내에 들어와서는 그 스킬을 사용하는 학생들이 이미 판을 치고 있었다. "왜 안 쓰지? 이 좋은 것을?"이라는 표정으로 다들 휴대폰에 찍힌 자신의 모국어와 내 떨떠름한 표정을 번갈아 본다. 계속 잔소리를 하면 그제야 부끄러운 줄 안다. 


요즘은 3급을 주로 가르치는데 3급에서 성적이 부진하거나 같은 급에서 유급 1~3회를 한 친구들은 하나같이 이 번역기와 친밀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여행할 때나 쓰고, 공부할 때는 쓰지 말라고 좋게 이야기해도 습관적으로 휴대폰에 손이 간다. 쓰지 말라고 또 그러면 이제는 휴대폰으로 웹서핑을 하거나 채팅을 하거나 오늘 배우는 문법을 모국어로 된 설명을 인터넷에서 찾아본다. 종교가 없는 내가 이따금 '주'를 찾는 이유. 


심각한 것은 이러한 현상이 1급에서도 종종 보이는 것이다. 1급은 가장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집단이다. 그래야만 했다... 그랬어야 했다... 그런데 요즘 1급 신입생들의 모습이 심상치가 않다. 물론 한 반 15명에게 모두 '열심히!'를 기대하진 못하겠지만 이녀석들 학기가 반이 지나가도록 한글을 못 읽는 문맹 비극을 보여준다. 그나마 떠듬떠듬 읽어도 연습을 시키면 죄다 사진을 찍어 번역한 문장을 보고 있다. 


간혹 선생님들은 이렇게 속터지는 학생들 때문에 많이 속상해 하시거나 힘들어하시는 분들이 많다. 그때마다 나는 '내려 놓으셔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사명감은 유지하되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써야 옳겠다. 하지만 이렇게 말해 놓고 막상 그렇게 또 휴대폰으로 교재를 찍어가며 '뇌를 고생 안 시키고 공부하려는' 학생들을 보면 괴씸하기도 하다. 아무리 집에 돈이 많아도 유학 온 거면 돈깨나 들 텐데... 


그래서 요즘도 나는 매시간마다 한스 란다처럼 웃으면서 번역 문장을 색출하고, 휴대폰을 뺏으며 광인처럼 수업을 하고 있다. 평경장이 말했다. "너도 이제 슬슬 미쳐가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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