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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굶찮니 Nov 02. 2023

[번역애매함 1탄] 끄랭짜이합니다

태국 사람들은 함부로 받지 않아요

내가 치앙마이에 거주하면서 난해했던 문화가 몇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느릿느릿한 이곳의 분위기가 그러했고, 뭔가 실수를 해도 '마이뺀라이(ไม่เป็นไร)'라고 하며 미소를 짓는데 도통 알 수 없을 것 같은 속내와 마지막으로 이 마이뺀라이의 심화 번외 버전인 이것이 있었다. 


"끄랭짜이(เกรงใจ) 카(ค่ะ)~"


마이뺀라이는 나중에 다루도록 하겠다. 사실 마이뺀라이는 워낙 자주 쓰기도 하고 사람들도 많이 알고 있기에 노잼이다. 그렇다고 끄랭짜이가 유잼인가. 아니다. 이건 너무 어렵다. 


한번은 애들에게 뭔가 사 주려고 했던 적이 있었다. 없는 월급 쪼개서 사 주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한국어과 아이들은 이따끔씩 나를 감동시킬 때가 많다. 그날은 별 이유는 없었다. 밖에서 애들 몇 명을 우연히 따로 만날 기회가 있어서 밥을 사려고 하는데 애들이 그러는 거다. "끄랭짜이 카."


나는 그게 뭐냐고 물어봤더니 머뭇거리면서 뭔가를 설명하려고 지들끼리 움찔움찔거렸다. 이것은 아이들이 태국어를 가르쳐 줄 때 꽤나 설명이 애매한 것을 할 때 쭈뼛대는 재스쳐이다. 집에 있는 고양이가 사냥 재스쳐를 취하는 모습과 츄르 먹을 때 앞발을 휘적대는 모습을 섞은 애매한 동작이다. 한국어로 '아니에요. 괜찮아요.'라고 해서 처음에는 '아, 괜찮다는 뜻이구나. 사양의 의미구나.'라고 생각했다. 80% 정답.


그런데 또 아무때나 쓰진 않았다. 이들이 뭔가 정당한 보상으로 받는 거는 또 납죽납죽 받았다. 그때는 또 끄랭짜이라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어느 날 재차 '끄랭짜이'가 무슨 뜻인지 물었다. 뭐, 사실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봤다. 


사양의 의미는 맞는데, 무언가의 대가로 받을 때 말고 갑자기 줄 때 주로 쓰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이해했다. 거절, 사양, 부담된다, 아니다 괜찮다, 내가 이걸 무슨 염치로 받냐 등등의 의미로. 사실 상황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대부분 이런 느낌이 한두 개씩 섞여서 발화되는 것 같다. 


끄랭짜이(เกรงใจ)에서 짜이(ใจ)는 심장, 마음이라는 뜻으로 태국어에서는 아주 용이하게 활용되는 단어다. 충분하면 퍼짜이, 기쁘면 디짜이, 속상하면 씨야짜이, 원펀맨의 진심펀치이면 찡짜이 펀치 정도가 되겠다. 

사전을 찾아보니 '끄랭(เกรง)'은 두려워하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마음을 두려워하다? 그러니까 마음에 걸리니까 염치가 없다. 그래서 사양한다 정도로 유추할 수 있겠다. 


한국에서도 한두 번은 사양하는 문화가 있기는 하다. '아니에요. 괜찮아요.'하고 한 번은 거절하고, 그 다음에 호의를 받는 것이 예의겠다. 듣자하니 충청도에서는 거절하면 세 번 이상은 권해줘야 받는다고 하는데 이것까진 모르겠다. 그렇다고 모든 상황에서 다 사양하거나 거절하는 것 같진 않다. 친소관계에 따라서는 바로 납죽 얼씨구나 받는 편이 서로 불편해하지 않는 경우도 있으니까. 상황에 따라서는 시원하게 그냥 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태국에서는 당연히 받아야 할 상황에서는 끄랭짜이라고 말하는 편은 아닌 것 같았다. 한국에서는 이런 상황에서도 최소 한 번은 거절하는 경우가 있는데, 조금 다른가 싶기도 하다. 하지만 뭐 별 차이는 없으니까. 


끄랭짜이의 의미는 알았지만 이것을 실제 발화에서 직역을 한다면 이게 또 애매하다. '아니에요. 부담스러워요.'도 너무 공격적이다. '아니에요, 사양할게요.' 이것도 아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가 가장 가까운데, 여기에 함의되어 있는 것은 '염치가 없다, 내가 이걸 어떻게 받냐?'가 더 들어가야 한다. 


태국을 떠나온 지 이제 2년이 넘어간다. 그 끄랭짜이 문화가 몸에 익을 즈음에 떠나왔으니 나는 다시 한국인 모드로 돌아와버렸다. 요즘은 사양도 잘 안 한다. 사무실에 있다 보면, 강의실에서 쉬는 시간에 애들이랑 이야기 하다 보면 간식을 자주 받게 된다. 이렇게 누가 뭔가를 주면 '아니, 이걸 왜, 아니 그.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하고 그냥 납죽 받아버린다. 끄랭짜이는 온데 간데 없고 그냥 '디짜이 막막(ดีใจมาก)'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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