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밉지 않아요
크리스마스여서 좋은 점이 있다.
작업하기 위해 이 카페 저 카페 콘센트 있는 자리를 찾으러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예전 독서실이나 구립 도서관 자리 확보하듯 치열하게 하지 않아도 된다. 요즘 홍대, 연남동 일대는 과포화 상태이기 때문에 여간 자리 잡기가 쉽지 않다. 어딜 가도 사람이 빼곡하게 차 있는 것이 마치 처치 곤란한 비품 상자를 창고 한 켠에 고이고이 쌓아 둔 것만 같은 인상마저 든다. 물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비참한 짐짝 신세는 이미 자리 차지하고 있는 그들이 아니라 나겠지만 말이다.
코로나의 치명상이 아직 날이 서 있을 시기, 나는 한국에 돌아왔다. 그간의 있었던 일을 푸념하고자 글을 쓰곤 했는데, 아지트처럼 여기던 카페의 사장님은 가게가 휑한 가운데에서도 친절하게 대해줬다. 그렇게 몇 개월을 제집처럼 드나들다가 코로나가 완전히 엔데믹으로 접어들자 사람들은 그 아지트마저 빼앗아 버렸다. 어느 한가로울 줄 알았던 주말 오후에 그 카페에 들렀는데, 딱 한 자리 남은 2인석 소파에 앉으니까 주인이 저쪽에 1인석 테이블로 옮기라고 정중하게 이야기했다. 응당 마땅한 요구이긴 했지만 내심 서운했다. 자리 빼앗긴 것이 서운한 것도 있었지만 뭔가 소중한 보금자리를 잃은 느낌이었다. 그길로 발길을 끊었고, 그 카페는 콘셉트을 달리해서 재오픈했다. 예전의 푹신푹신한 소파도 없어졌다.
정말 모순적이게도 나는 사람이 더 많은 카페를 전전했다. 사람이 북적이는 것이 싫어서 작은 가게도 찾아다녀 봤는데, 오히려 작은 가게는 전기도둑이 되는 죄책감이 두 배로 들었고, 사실 그런 곳은 자리도 마땅치 않았다. 나같은 이들이 좀 더 큰 카페로 같이 몰리기 시작했고, 어중간한 시간에 오면 콘센트 이용은 물건너 간다.
모두가 사랑과 낭만을 찾아 떠난 이 시점, 크리스마스 이브 저녁은 아늑한 공간을 나에게 선물해 주었다. 좋은 글 하나 뽑아보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겠지만 마땅히 좋은 글감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황금같은 시간에 올해도 솔로인 상태에서 처량하게 지내고 말다니 우습기만 하다. 학생들에게는 연애하라니 뭐라니 하면서 잔뜩 부추겨 놓고는 정작 이번 해도 나홀로 크리스마스이다.
예전에는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또는 매년 내 생일 때마다 무얼 했는지 기억해내곤 했다. 작년에는 누구와 있었고, 그 재작년에는 어떻게 지냈는지 비교적 세세하게 기억해냈다. 여자친구가 있었을 때는 그나마 구색 갇추어 보냈고, 없었을 때도 친구 많던 시절에는 소소하게 모여 술을 먹기도 했다. 아르바이트 머신이었을 때는 주로 가게에서 주요 명절을 지내고 아침해가 비추는 취객들을 보며 퇴근했었다. 태국에서는 크리스마스가 공휴일도 아니고 메인 이벤트도 아니어서 그냥 출근 준비하고 잠이나 잤던 것 같다.
그런데 그렇게 세세하던 기억이 이제는 기억조차 하기 싫은지 자꾸 날려버린다. 처음에는 그저 나이가 들어 기억력이 감퇴한 것이구나 생각했지만, 이게 가면 갈수록 방어기제같이 일부러 기억하는 것을 스스로 막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고 만다. 지난해가 괜찮았다면 이번 해가 더 비참해 보이니까. 지난해도 별로였다면 이번 해도 다를 바가 없으니 암울하니까.
또 언젠가의 크리스마스에는 이틀 동안 잠만 잤던 기억이 있다. 24일 오후부터 시작해서 다음날 늦은 밤에서야 깨어났다. 누군가에게는 특별했을 이틀이 지나고 모두에게 평범할 26일이 다가오자 긴 잠수 끝에 수면으로 올라온 것 같은 안도감과 거친 과호흡으로 인한 어지러움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아마 나에게는 그동안에 자각하지 못했던 넘쳐나는 시간 때문에 괴로웠던 것일 수도 있다. '계획을 할 시간'이다. 이번 생일에는 뭐하고 지낼까.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누구와 보낼까.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는 않지만 퇴근하고 바로 이불 속으로 들어가 지내는 나날에서는 좀처럼 진취적이지 못하다. 그렇기에 이런 특별한 이벤트를 앞두고도 아무 생각이 없다.
크리스마스보다도 더 감흥이 없는 것은 생일이다. 이제는 생일이랍시고 부어라 마셔라 하는 친구들도 없고, 그나마 있는 친구들도 간이 낡았음을 시인하고 적당히 지내려 한다. 내 생일도 안 챙기는데 크리스마스는 더 말해 뭐할까.
약속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파토 난 약속이 두어 개 있었는데, 사실 그것 때문에 짜증이 올랐던 것은 바로 어제까지였다. 지금에야 드는 생각은 뭐 오늘이 아니면 또 어떤가 싶은 것이다. 어차피 매년 오고, 비슷한 감동과 상황은 매주 주말에 노려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물렁물렁해졌다.
그렇기에 지금 글을 쓰는 순간에도 저멀리 지나가는 커플을 보면서도 아무런 짜증이 올라오지 않은 것이다. 나는 1년 전부터 관점을 바꾸기로 했다. 어차피 내가 못할 거면 니들이라도 실컷해라. 그런 당신들을 보며 내가 부러워 안달이 나게 되면 나도 언젠가 또 꾸역꾸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모임이든 연애든 해보겠거니. 새해에 금주, 금연, 운동 자극을 서로 주고 받듯, 크리스마스에는 연애에 대한 자극을 주고 받으니 얼마나 유익한 날인가.
이렇게 쓰고 보니, 올해는 커플들이 부쩍 줄어든 것 같다. 여기에는 삼삼오오 여러 명이 모인 사람들이 많다. 커플들도 있지만 많지 않다. 요새 연애들을 안 한다는 이야기가 사실인가 싶어 씁쓸하기도 하다. 빨리 연애들하고 행복해져서 나에게도 자극을 주었으면 좋겠다. 나도 그들이 미칠듯이 부러워져 따라갈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