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릉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2부)
2월 초, 새미와 강릉에서 살기로 결심하면서 대화 주제가 자연스럽게 신혼집은 어떻게 꾸밀지로 옮겨갔다. 내 입에서 침대, 소파, 세탁기, 냉장고, 식탁 책장 등 집에 들일 가전 가구 이름이 줄줄이 나왔다. 예산 안에서 어떤 제품을 살 수 있을지 저 혼자 신나서 말하는데, 잠자코 듣고 있던 새미가 말을 꺼냈다. "오빠, 우리가 들어갈 집에는 텔레비전을 안 들이고 싶어". 예상치 못한 발언에 순간 내 동공이 커졌다.
새미는 의아해하는 내게 이유를 설명해주었다. 아동 청소년을 상담하다 보면 상당수 어린이가 텔레비전이나 스마트폰에서 눈을 못 뗀다고 한다. 많은 부모가 영상 매체 없이는 육아하기 힘들 정도라고. 그 때문인지 새미는 훗날 아이를 키운다면 텔레비전 없는 환경에서 살고 싶어 했다. 우리 아이가 자연과 가까운 곳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자기 꿈을 펼쳐 나가기를 바랐다. 비록 그것이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라 해도 말이다.
새미의 말을 들으면서, 일본에서 자전거 여행했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자전거 여행 5일 차, 나고야에서 오사카로 향하는 길목이었다. 당시 미에현의 어느 게스트 하우스에서 묵었는데, 그때 느낀 감정을 글로 옮겨본다.
"자전거 여행 5일째였다. 그날 밤은 에도 시대의 일본 전통 가옥 거리가 남아있는, 미에현의 石垣屋(이시가키야)라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하룻밤 묵을 예정이었다. 그곳은 처음 들어설 때부터 범상치 않았다. 400년 전 지어진 에도 시대의 옛 가옥들이 즐비한 거리부터 시작해, 게스트 하우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천천히 인사하러 오는 주인집 강아지, 방문한 손님에게 숙소 내 준수 사항과 편의 시설을 친절하게 안내해 주는 사장님의 모습이 단번에 내 마음을 끌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한쪽 선반에 일본 전통술이 진열돼 있었다. 사장님은 진열장을 가리키며 단골손님들이 놓고 간 술이라고 했다. 숙박하는 사람은 누구나 마실 수 있다며 내게 한 잔 권했다. 숙소는 사장님 부부가 운영했고, 그들에게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사내아이가 한 명 있었다. 사장님 부부는 그날 방문한 손님과 같이 장을 보러 가고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아이는 텔레비전 없이 새로 온 방문객과 어울려 놀았다. 도보 여행 중인 노부부, 오토바이 여행가, 자전거 여행가 가지각색의 방문객이 모인 게스트 하우스였다. 그곳은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섞이고 동시에 아우르는 공간이었다"
그중 내 안에 또렷이 남은 기억이 하나 있다. 아이가 저녁을 먹은 후 방문객에게 어서 놀자며 보채는 모습이었다. 아이는 난생처음 보는 손님의 손을 잡아 책방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같이 그림책을 읽었다. 나는 그때 광경을 통해 텔레비전 없이 살아가는 아이가 사회성을 익히는 모습을 직접 보았다. '이 얼마나 올바르게 자라는 아이의 모습인가?' 잠깐이었지만 내게는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었다.
나는 순순히 새미의 제안을 따랐다. 평소 집에서 텔레비전을 켜 놓지만, 실제로는 그 앞에서 노트북을 열어 작업할 때가 대부분이었다. 우리 둘 다 텔레비전을 자주 안 보기 때문에 크게 문제는 없을 듯했다. 그런데 잠깐만! 그렇다 해도 아예 영상 매체를 아예 안 보는 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자연 생태주의의 삶을 실천한 헬렌 니어링&스콧 니어링 부부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대안을 생각했다.
상의 끝에 빔 프로젝터를 장만하기로 했다. 인터넷에서 가성비 좋은 제품을 하나 골라 주문했다. 앞으로 이 기기가 텔레비전의 역할을 대신할 예정이었다. 가끔씩 영화나 예능, 스포츠 중계방송을 보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때 이 프로젝터를 벽에 쏴서 영상을 보는 거지! 다만 전용 스크린 없이 흰 벽에 비추다 보니 맨 아래 부분에 소파가 그대로 드러났다.
지난밤에는 저녁밥을 먹으며 영화 비긴 어게인을 감상했다. 가정용이어서 화면과 자막의 싱크가 잘 맞을까 내심 초조해하며 영상을 틀었다. 다행히 안 끊기고 제때제때 비쳤다. 새미는 평소 뮤지컬과 음악 영화를 좋아했다. 하지만 아직 비긴 어게인을 안 봤다 했다. 의외인 사실에 조금 놀랬지만, 덕분에 홈 시네마를 맘껏 감상했다. 여유롭고 평온한 날이 또 하루 지나갔다. 내일도 오늘처럼 평화로운 날을 보내길. 속으로 혼자 생각하며 영화를 감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