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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래분수 Dec 14. 2021

미국에서 김치 팔기

코티지 푸드 사업기

미국 콜로라도의 한 시골 마을에서 김치 장사를 하게 된 건 남편 때문이다. 채식을 시작한 뒤로 대도시에서 중소도시를 거쳐 소도시로 이사 왔더니 나가서 먹을만한 식당이 줄어들었다. 그러자 남편은 채식 식당을 운영해보고 싶어 했다. 꿈이 큰 건 장한데 요식업이라니 도저히 감이 안 잡혔다. 무엇보다 식당 일의 양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돌에 눌리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작게 시작해보자고 남편을 살살 꾀었고, 직거래장터에서 김치를 팔게 되었다.   <플렉시테리언 다이어리> 138쪽


다행히 비싼 상업용 주방을 빌리지 않아도 김치를 팔 방법이 있었다. 집에서 만든 음식을 직거래 형태로 팔 수 있는 코티지 푸드 Cottage Food 법 덕분이다. 주마다 관련 법이 다르겠지만, 콜로라도의 경우 건조 농산물이나 씨앗 차 향신료 꿀 잼 달걀 구운 과자나 빵 등이 코티지 푸드로 팔 수 있다. 그중 저장식품도 있는데, pH 4.6 이하 산성이면 팔 수 있다. 김치가 여기에 속한다.


집에서 만든 김치를 직거래 장터에 갖고 나가서 팔 수 있다니, 갑자기 내 마음도 동했다. 그럼 한 번 해볼까? 쉽게 시작할 수도 있었지만 철두철미한 남편은 기본 식품 취급 강좌 Food Handling Course를 신청했다. 우리는 가필드라는 귀여운 이름의 카운티 내, 라이플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을 가진 작은 마을에서 콜로라도 주립 대학이 운영하는 공개강좌를 들었다. 오랫동안 양봉을 했다는 부부, 새싹 채소 사업을 꿈꾸는 젊은 커플이 함께 참여했다. 교육은 세 시간 정도로서 코티지 푸드의 정의와 범위, 식품 취급법과 조리 도구 살균법, 상표 만드는 법과 판매 시 유의점, 각종 주의사항 등으로 꾸려졌다.


제품에는 생산자 이름, 주소, 연락처, 생산 날짜, 재료가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보건 당국의 허가나 위생 검사가 필요하지 않은 코티지 푸드 생산품'이라는 내용을 담은 고지를 꼭 표시해야 한다. 이 고지는 판매 시 매대에도 붙여 소비자에게 알려야 한다.

콜로라도 코티지 푸드 생산품은 반드시 콜로라도 안에서 직거래만 해야 한다. 지역 슈퍼마켓에 팔 수 없다는 뜻이다. 다만, 코티지 푸드 특성을 이해하는 대리인이 있을 경우에 한해 특정 가게에서 관련 내용을 고지하고 판매 가능하다.  

우리는 산성도가 기준에 부합하는지 보기 위해 보건국으로 김치 샘플을 보냈다. 사흘 정도 발효한 배추김치, 백김치, 깍두기, 오이김치 네 종류 샘플을 보냈고, 며칠 후 나온 결과는 pH 4.6 이하로 조건에 맞았다. 이 보건국 검사 결과지를 보관하고, 이후 요리법이 바뀌거나 새 종류를 추가할 때면 집에서 pH 측정기로 확인했다. 익혀 먹는 배추나 무 김치는 pH 4.6 이하 조건을 가뿐히 충족한다. 오이김치는 이 기준에 맞추려면 좀 시다는 느낌이 든다. 그래도 생전 처음 맛보는, 색다른 오이 맛을 많은 이가 좋아해 준다.

이런 가족 수공업 형태로 내는 수익에는 법적 제한이 있다. 코티지 푸드로 사업을 할 경우 제품 당 연간 순익이 만 불을 넘으면 안 된다. 다행히 (아니, 불행히) 배추김치 한 종류로 수익이 만 불을 넘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그밖에 남편은 유한회사(limited liability company : LLC) 사업 등록을 하고, 관련 보험에도 가입했다. 사업 등록이나 보험은 코티지 푸드에 필수 사항은 아니지만, 혹시 모를 사고나 다툼에 대비할 수 있다. 남편이 사업 등록과 보험, 은행 계좌 개설 등 서류 작업을 하는 동안, 나는 요리법을 정하고 회사 로고와 상표 디자인을 했다.


구하기 힘든 부추 대신 고수를 넣고 오이김치를 만들었다.


이 작은 사업을 준비하면서 가장 귀찮았던 과정은 요리법 만들기였다. 눈대중으로 요리하는 나에겐 번거로운 일이었지만, 남편 말대로 일정한 맛을 위해 재료의 양을 정해야만 했다. 일단 요리법이 정해지니 여러모로 편하긴 했다. 가끔 재료 사정에 따라 남편 몰래 양을 슬쩍 바꾸면, 그때마다 달라지는 김치 맛에 놀라고 그러면서 배운다. 내 주요 업무는 김치 만들기였고 한없는 당근 채썰기 끝에 남편에게 시비를 걸곤 했다.
남편은 김치 만드는 것 외에도 온갖 행정과 서류 업무를 놓치는 일 없이 해냈다. 장터 나가는 날 새벽에 나를 깨우고 간식을 준비하고 김치가 든 아이스박스와 탁자, 천막 등을 차에 싣고 운전했으며, 장사 뒤에는 경리 업무도 봤다. 그 여름 끝에 우리 손에는 한국에 갈 항공권 값이 생겼고, 광장시장 근처에서 분홍색 채칼을 산 뒤 채 썰기로 싸우는 일은 없어졌다.   <플렉시테리언 다이어리> 138쪽



첫 해에는 일주일에 두 번 직거래 장터 두 곳으로 장사를 나갔다. 근방 직거래장터는 보통 5월부터 10월까지 이어진다. 숨 쉬기 힘들 정도로 건조하고 살갗을 태우는 뙤약볕에 서 있는 건 힘들지만, 사람들이 김치 맛을 보고 싶어 하는 건 신나는 일이었다. 이듬해에는 코로나19 전염병으로 시식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대신 사람들이 큰돈 안 들이고 김치 맛을 볼 수 있도록 아주 작은 병에 담은 김치를 제품 목록에 추가했다. 올해에는 격주에 한 번만 장터에 나갔다. 이곳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손님에게 김치란 한국인처럼 끼니마다 푹푹 떠먹는 게 아니라, 좋은 음식을 아껴 먹듯이 음미하며 먹는 음식이다.  그래서 격주에 한 번 가장 호응이 좋은 시장 한 곳에서 팔아보았다. 그게 부족한 손님들, 그러니까 한국인처럼 김치를 많이 먹는 단골손님들에겐 필요할 때 따로 배달을 한다.


매대에는 작은 칠판이 있다. 채식 김치라고 썼는데, 그걸 보고 멈춰서 말을 거는 이들이 꽤 있다. 그들은 김치를 좋아하지만 젓갈 냄새가 너무 심해 못 먹는다거나, 생선을 안 좋아한다거나, 또는 원래 채식을 한다는 이유로 우리 김치를 반긴다.


이런 이야기를 해주면 엄마가 제일 재미있어한다. 미국인들이 마늘 냄새 풍기는 김치 맛을 보고 싶어 하고, 그 김치를 사러 다시 오는 사실에 신기해한다. 그러곤 젓갈과 찹쌀풀을 안 쓰고 어찌 김치 맛이 나냐고 의심을 떨치지 못하는가 하면, 행여 자식 몸이 상할까 걱정스러운 말을 늘어놓는다.     
우리 김치는 젓갈을 쓴 김치보다 향과 풍미가 덜하지만, 청량한 김칫국과 아삭한 채소 맛은 그대로다. 배추와 무청은 풋내 나지 않도록 얌전히 씻는다. 소금을 적당히 써서 양념을 만들고 발효 중에는 공기 접촉을 최대한 줄이면서 이삼일쯤 익혔다가 냉장고에 넣어둔다. 그럼 나머지 일은 소금과 채소가 알아서 한다.
<플렉시테리언 다이어리> 140쪽


지역 농부들에게 산 무를 먹기 좋게 잘라 만든 무김치.


남편은 후루룩 짭짭의 재밌고 맛난 느낌을 모를지라도 김치만은 어떻게 먹어야 제맛인지 안다. 세로로 길게 쭉 찢어서 입안에 쏙 넣고 손가락에 묻은 양념은 쪽쪽 빨기. 절인 배추와 양념을 섞다 보면 어느새 남편이 옆에 다가와 기다린다. 그럼 나는 엄마가 그랬듯이 붉은 윤기가 흐르는 양념을 배추 속잎에 얹고 남편 입속에 넣어준다. 엄마처럼 입을 쫑그리며. 그리곤 좀 짜지 않냐고 걱정하듯이 물으면 남편은 매번 이렇게 답한다. 음, 이 맛이야!   <플렉시테리언 다이어리> 145쪽


앞뜰에서 딴 붉은 배로 백김치를 담갔다.


김치 팔아 큰돈 쥐지는 못해도 밥상에서 김치가 빠지는 일은 없어졌다. 고슬고슬 지어진 현미밥에 상큼한 김치를 올려서 한입 먹고 그 감격을 나누고 싶어져 밥 먹다 말고 남편에게 말을 건다. “맛있으면 맛있다고 흥 나게 말해봐!” 그럼 남편은 “응, 맛있다.” 하고, 나는 “아니, 정말 정말 맛있다고 해야지.” 한다. 그러면 남편은 진지한 표정으로 “응, 진짜 맛있어.” 해준다. 그리고 우린 다시 별 대화 없이 음식 맛에 빠진다. 막 딴 김치 병에서 공기 빠지는 소리가 뽕뽕뽕 이어지고, 남편은 오물오물 고양이는 냠냠 나는 후루룩 짭짭 밥을 먹는다.   <플렉시테리언 다이어리> 146쪽


김치 장사하니 김치말이 국수 같은 호사도 누린다.



*위 코티지 푸드 관련 내용은 2019년을 기준으로 한다.




“칠십팔억 지구인 속에서 내 존재는 너무도 작지만, 나는 하루 세끼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이다.”
세끼만큼의 변화를 원한다면, 에세이 <플렉시테리언 다이어리> 책 훑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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