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는 늘 우리 삶의 변덕을 닮습니다.
지지난 주에는 무더위가 숨을 막더니, 지난주는 폭우가 무겁게 쏟아졌습니다.
큰일 없이 잘 지내셨기를 바랍니다.
어제는 아침부터 일정이 있어 편지가 하루 늦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제시간에 도착하는 편지를 쓰고 싶었습니다. 아직 제게는 그런 프로 의식이 장착되지 않았나 봅니다.
들쑥날쑥한 발걸음을 너그러이 받아 주시리라 믿으며 몇 자 변명을 덧붙여 봅니다.
요즘 출근길에는 소설을, 집에 돌아오면 에세이나 시집을 읽습니다.
이번 주 출근길에 동행한 책은 르 클레지오의 『황금물고기』였습니다. 북아프리카 소녀 라일라가 세상을 떠도는 이야기입니다. 읽으면서 자꾸 다른 책들이 겹쳐 떠올랐습니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황석영의 『바리데기』, 그리고 오래전 기록된 『하멜 표류기』와 『표해록』까지. 김영하의 『검은꽃』, 이금이의 『알로하 나의 엄마들』도 함께 떠올랐습니다. 돌아보니 제가 오래 기억하는 이야기들은 모두 어디론가 떠나는 주인공을 품고 있더군요. 일종의 ‘표류 문학’입니다.
“더 이상 멀리 갈 필요가 없다. 이제 나는 마침내 내 여행의 끝에 다다랐음을 안다. 어느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이곳이다.” (문학동네, p.275)
납치되어 세상을 떠돌던 라일라는 마침내 자신이 속해 있던 힐랄 족의 마을로 돌아오고 나서야 자신의 표류가 끝이 났음을 알게 됩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떠나는 인물들은 본래 속했던 세계와의 단절을 겪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체성을 붙잡으려 애씁니다. 이 과정에서 '떠남'은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지 묻는 강렬한 기회를 줍니다. 저 또한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정체성을 묻는 질문을 합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회복될 수 있을까?”, “시련 앞에서 어떤 모습을 보이는가?” 와 같은 질문들입니다. 아직 제가 머무를 곳을 찾지 못한 채 정서적 방황을 이어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떠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일까요?
라일라가 떠나온 곳에 정착하고 나서야 표류를 마쳤듯, 저 또한 제가 이르고자 한 곳에 도달하면 방황을 마치게 될까요?
예전에 성격 검사에서 ‘로빈슨 크루소형’이라는 결과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떠나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은 어쩌면 성격의 반영일 수도 있겠습니다.
밤에는 세라 망구소의 『망각 일기』를 읽습니다. 출산 후 평생의 습관이었던 기록 강박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담긴 책입니다. 그녀는 25년 동안 일상의 기록을 일기로 남겼고, 그 기록을 바탕으로 『망각 일기』를 썼습니다. 처음에는 정체가 불분명하게 느껴졌지만, 기록을 통해 기록 강박을 내려놓는 과정임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나는 엄마가 되었다. 엄마가 된 나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시간을 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시간은 필멸과 결부되었다.” (pillow, p.57)
투쟁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육아의 풍경 속에서 세라 망구소의 판단처럼 망각은 오히려 삶을 견디게 하는 전략이 될 수 있습니다. 이성보다 감정이 판단 속도가 빠르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엄마가 잠시 화장실에 가는 시간조차 허락되지 않는 육아의 시간 속에서 기억보다 망각을 택하는 것은 - 감정이 생존을 위한 효율적인 판단 매커니즘이 되는 것처럼 - 무의식적인 삶의 전략일지도 모릅니다. 망각을 통해 여백을 만들어야 삶을 채워 넣을 수 있을 테니까요.
저 역시 그랬습니다. 큰아이가 7개월이 되었을 때부터 층간소음 매트 위에 담요를 깔고 아이를 눕힌 채 석사 논문을 썼습니다. 직장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몇 년을 미루다 시작한 글쓰기였는데, 영유아를 돌보는 일이 그토록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인 줄 알았다면 그렇게 무모하게 시작하지 않았을 겁니다. 읽기와 글쓰기는 처절한 투쟁과 같았고, 결국 논문 표지의 감사 멘트는 좁은 거실에서 그 시간을 함께 버틴 큰아이를 향해 쓰게 되었습니다. 여름의 한적한 졸업식장에서 친정 엄마와 남편, 아이를 안고 학위 가운을 입고 찍은 사진이 한 장 남아 있습니다.
본격적으로 책에 빠져든 것은 이 무렵이었습니다. 집 안에서 엄마가 가질 수 있는 취미 생활은 제한적이었습니다. 컴퓨터를 켜고 기저귀 한 팩을 주문하는 일조차 아이가 잠든 짧은 틈을 노려야 했습니다. 중간에 아이가 깨면 하던 일을 잊고 아이를 달래야 했지요. 그래서 책 읽기가 제겐 가장 적합한 취미가 되었습니다. 이 또한 투쟁적이었지만, 그럼에도 아이 옆에서 읽다가 일이 생기면 덮어 두고, 다시 틈이 나면 펼쳐 읽을 수 있었습니다. 피곤할 때도 책은 제게 빠른 수면제이자 탈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지금은 아이들이 자라서 예전보다 여유가 생겼지만, 독서만큼 시간 관리에 정신 건강에 삶의 전략으로서 효율적인 취미는 아직 찾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읽은 책 가운데 김혜순 시인의 『여성, 시 하다』라는 평론집이 있습니다. '시 하다'라는 개념을 만나고, 내가 시인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시를 할 수는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시를 쓰지 않아도, 시 안의 인물이 내가 될 수 있다는 생각. 누군가의 엄마로서 이 시간 속에서 존재하고 살아가는 일 자체가 이 땅에서의 의미가 되지 않을까. 꼭 의미 있는 글을 남기지 않더라도, 내가 남긴 아이라는 사람책이 그 의미가 되어주지 않을까 하는 위로. 그렇게 살다보면 정말 '시 하는' 순간도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 세라 망구소의 『망각 일기』는 바로 그러한 생각과 감각의 과정을 풀어낸 글쓰기처럼 읽혔습니다. 그녀의 글이 누군가에게는 실험적인 양식으로 보일지 몰라도, 그 사정을 아는 이들에게는 삶의 통과의례처럼 읽혔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표류’와 ‘망각’은 서로 멀리 있는 단어 같지만 결국 같은 뿌리를 지니고 있습니다. 표류는 자리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고, 망각은 버티기 위한 숨구멍입니다. 떠남이 정체성을 묻는 과정이라면, 망각은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여백입니다. 이번 주에 읽은 『황금물고기』와 『망각 일기』두 책은 다른 듯 닮은 듯 살려고 애를 쓰는 길 위에서 제 삶과 겹쳐졌습니다.
지난 편지에서 가족 독서 모임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시간은 이제 주말의 습관이 되었습니다. 가족들도 '이제 모임은 으레 하는 거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듯합니다. 제가 은근한 가스라이팅을 했는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책 앞에서 모여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일이 가족 사이를 이어 주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합니다. 세대가 다른 식구들이 책을 매개로 대화를 시작할 때, 평소라면 지나쳤을 감정이나 생각을 비로소 드러내는 순간도 있습니다. 가족 독서 모임은 사소하지만 단단한 끈이 되어줍니다.
얼마 전, 예전에 함께 독서 모임을 하던 분의 부고 소식을 듣고 장례식장에 다녀왔습니다. 그분의 가족과는 교류가 없어 낯설었지만, 그분과 책을 매개로 나눈 시간들이 떠올랐습니다. 책을 함께 읽을 뿐, 일상에서 많은 교류가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책을 통해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어떤 생각을 품고 살아온 분인지는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일상적 관계에서는 알기 어려운 내면의 결이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 드러났던 것이지요. 책이 사람과 사람을 이렇게도 깊게 잇는구나, 새삼 생각하며 그분의 영원할 부재에 대한 깊은 슬픔을 느꼈습니다.
책은 삶의 제 자리를 찾게 합니다. 어떤 책들은 고통스러운 순간을 버티는 해법의 단서를 줍니다. 그리고 또 어떤 책들은 타인을 깊이 이해하게 하며, 서로를 잇는 소중한 다리가 됩니다. 이번 주가 제게는 그 사실을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다음 주에도 한 주간의 책 이야기를 전해 드리겠습니다.
늘 평안하시길 빕니다.
* 편지의 발행일을 일요일로 변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