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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7.12. 책편지] 책그늘 아래에서

by 겨울아이 환

지난 한 주는 제가 겪어 본 여름 중에 가장 강렬하게 더웠던 시간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내셨나요?

저는 더위를 마치 ‘나와는 상관없는 일’처럼 여겨 보려고 시큰둥한 마음을 장착해 보았습니다.

먼저 긴 출퇴근길엔 마음만이라도 시원한 곳으로 데려다줄 책을 골라서 집을 나섰어요. 요즘 아침 지하철에서 저처럼 책을 들고 있는 분들이 유난히 많아진 것을 봅니다. 책 그늘에 잠시 몸을 숨기려는 마음이 서로 닮아있는 듯했습니다.


지난주에 함께 했던 첫 번째 책은 미국 작가 릴리 킹의 『어느 겨울 다섯 번의 화요일』입니다. 큰 사건이 일어나지는 않지만 일상 속의 미세한 감정들을 섬세하게 포착한 단편 소설집으로, 적외선 카메라로 사람들의 마음의 온도를 들여다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내가 소설을 쓴다면 이렇게 다양한 사랑의 모습을 주제로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앨리스 먼로 스타일의 단편 소설을 좋아하시는 분들이 계시면 추천하고 싶습니다. 아끼느라고 하루에 한 편씩 읽었습니다.


두 번째 책은 황정은 작가님의 새 에세이집 『작은 일기』입니다. 작년 12월 3일 10시 23분부터 올해 5월 1일까지의 기록입니다. 그 기간 동안 작가가 겪은 내면의 움직임이 진솔하게 담겨 있습니다. 저 또한 그 겨울, 마음이 자꾸 멈칫거리는 느낌에 자주 붙잡히곤 했습니다. 타인의 일기를 통해 그 주저함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 늦었지만 짚어 볼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기운이 어떻게 나의 일상에 스며드는지를 조용히 마주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혼자 책 속에 숨는 것도 좋았지만, 문득 가족과 함께 목소리를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지난 편지에 첫 가족 독서 모임을 했다고 말씀드렸지요. 그 이야기를 조금 더 들려 드릴까 합니다.

큰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고 나니, “밥 챙겨 먹어라.”, “용돈 있니?”, “이제 자라.”라는 말 세 마디로 하루가 채워지는 날이 많았습니다. 답답한 마음이 쌓이던 어느 날, 다소 충동적으로 가족 독서 모임을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사실은 제 마음대로 결정하고 통보한 셈이었지요.


1. 첫 책과 시간 정하기

매주 토요일 또는 일요일 저녁 8시.

첫 책은 캐나다 작가 조던 스콧의 그림책 『나는 강물처럼 말해요』였습니다.

읽기에 부담이 없으면서도 충분한 의미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책으로 골라 보았습니다. 그림책은 짧지만 세대와 언어의 벽을 가볍게 넘어서는 힘이 있기에 가족 모두에게 알맞은 선택이라고 여겼습니다.

다음 가족 독서모임 책은 『100세 인생 그림책』입니다.


2. 논제 준비

논제는 논의에 익숙하지 않은 가족들을 위해 깊게 고민하지 않아도 답할 수 있는 질문으로 준비했습니다.

* 나를 자연물로 비유한다면? 그 이유는?

* 말이 막힐 때 나는 어떤 기분이 드나? 그런 상황에서 내게 해주고 싶은 위로의 말은?

* 사람마다 말하는 방식이 다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에 어떻게 반응하면 좋을까?

* 내가 가장 나답게 말하는 순간은 언제인가?


3. 진행

저녁 식사를 마치고 식탁을 치운 뒤, “독서 토론하자.”라고 했더니 다들 밍기적거리더군요. (이 때 제 마음, 짐작 가시죠? ^^) 그래도 가족 모두가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림책이다 보니 유튜브에 관련 영상이 많았습니다. 토론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함께 영상을 보고 돌아가면서 논제에 답을 말해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무척 어색했습니다. 큰아이는 빨리 끝나면 좋겠다는 표정을 지었고, 작은아이는 질문과 밀접한 관련이 없는 답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논제에 이르자, 큰아이가 솔직한 말들을 하기 시작했고, 작은아이도 목소리를 조금 높여 자기 생각을 이야기했습니다. 그 짧은 시간이 가족의 일상에 작은 균열을 만들고, 동시에 서로를 잇는 다리가 되었습니다.


다음 주 책을 언급했을 때 “안 하고 싶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절반 이상의 성공이라고 여기고 싶었습니다.


폭염이 꺾일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더위 탓에 식구들이 집 안에 모여 있는 시간이 오히려 드문 요즘, 간단하지만 정겨우며 우아하기도 한 가족 독서 토론의 시간을 마련해 보는 건 어떠실까요? 저희 가족은 그 서로의 목소리를 다시 듣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주말에 다시 도전해 보려 합니다.


이번 주 토요일도, 제 편지를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덥지만 예쁜 하늘은 유난히 예쁜 요즘입니다.

지칠 땐 하늘 한 번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환기되더군요. 하늘이 일기처럼 마음을 받아 적는 것만 같습니다.

다음 편지도 함께해 주세요.

늘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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