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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8.7. 책편지] 평범한 인생의 주인공은

바로 나야? 나~! 나야! 나!

by 겨울아이 환

이번 편지는 지난 6월 14일에 썼던 편지를 다시 읽다가 문득 떠오르는 게 있어서 쓰게 되었습니다.

6월 14일 편지에서는 “다음 편지에는 카렐 차페크의 『평범한 인생』에 관한 글을 자세히 쓰겠다”라고 적었었지요. 그런데 오늘 다시 그 편지를 읽어 보니, 차페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을 충분히 담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번외편 형식으로, 그때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조금 더 풀어 보려 합니다.


체코 작가 카렐 차페크를 처음 알게 된 건 『정원 가꾸는 사람의 열두 달』이라는 책을 통해서였습니다. 정원을 가진 삶에 대한 오랜 동경이 있었던 저로서는 이 책을 외면할 이유가 없었지요. 책 표지도 참 예뻤고요. 정원을 가꾸며 쓴 위트 있는 일기 형식의 책인데, 저는 이 책을 두 번 읽었습니다. 처음엔 낯선 유럽 식물 이름이 많아 조금 어려웠지만, 두 번째 읽을 땐 하나하나 찾아가며 읽었더니 훨씬 생생한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다음에 다시 읽을 때는, 그 기억들이 얼마나 또렷이 남아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평범한 인생』은 제가 좋아하는 김영하 작가님 덕분에 알게 된 책입니다. 작가님께서 『단 한 번의 삶』이라는 에세이집의 랜선 팬사인회에서 이 책을 언급하셨는데요, 자신의 에세이와 연결 지어 이야기하신 내용이 인상 깊었고, ‘김영하 작가님 추천’이라면 믿고 읽는 터라 바로 읽고 싶은 책 목록에 올려두었습니다. 그리고 매달 참여하는 독서 모임에서 이 책을 읽자고 제안해 보았어요.


지금 쓰고 있는 이 책편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것이 『평범한 인생』을 읽고 난 후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자신을 ‘평범한 사람’이라 칭하며 지난 삶을 회고하는 주인공을 보며, 그의 삶과 제 삶 사이에 많은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어떤 직업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책임을 다하는 것이 특히 미덕’인 일을 하고 있다는 점, 부모님의 기대를 받으며 자랐지만 결국은 여느 평범한 사람들처럼 그 기대에 꼭 부응하지는 못한 채 조용한 길을 걷고 있다는 점, 모두 저와 닮아 있었습니다.


제 나이가 마흔 중반인데요, 혹시 이 평범함을 벗어날 가능성이 있을까요?

로또에 당첨되려면 로또를 사야 하듯, 평범함을 벗어나려면 평범하지 않은 삶을 기획이라도 해야 할 텐데요.

하지만 저는 내일 아침 늦잠이 걱정되어 일찍 잠들고, 두 아이와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고 싶어 술도 거의 마시지 않습니다. 살다 보면 멋진 사람을 만나 마음이 흔들릴 때도 있죠. 그럴 땐 속으로 이렇게 외치며 마음을 다잡습니다.

‘다음 생에 꼭 만나요. 이번 생은 너무 정돈되어 있어서 당신을 끼워 넣을 틈이 없어요.’

심지어 가계부조차 쓰지 않아도, 저는 늘 그만큼만 씁니다. 나도 모르게 규칙을 지키는 평범한 사람처럼요. 몸무게도 BMI 불변의 법칙이라는 것도 있을까 싶게 고등학교 졸업 이후 큰 변동이 없습니다.


이렇게 저를 묘사하다 보면, 정말이지 ‘평범한 인생의 주인공은 바로 나야 나’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시 소설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처음엔 자신의 삶이 지극히 평범하고 특별할 것 없는 인생이었다고 믿습니다. 모범적인 학생이었고, 정해진 궤도 안에서 성실하고 억척스럽게 살아왔으며, 우울한 기질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단순하고 조용한 삶이었다고요. 드라마틱한 순간이나 극적인 사건은 없었고, 회고할 만한 가치도 별로 없는 삶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회고가 계속되며 그는 점점 더 많은 것을 떠올립니다.

어린 시절 자신이 지녔던 다양한 가능성들, 꿈꾸었던 삶의 경로들, 끝내 가지 못한 길들 말입니다. 지금은 다 잊었다고 하지만, 그는 한때 ‘체코의 랭보’라 불릴 만한 시를 썼던 문학청년이었고, 집시 소녀를 사랑했던 열정적인 소년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인생은 단지 ‘겪은 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겪지 않은 일’들, 선택하지 않은 삶들도 고스란히 내면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요.


결국 그는 자신의 삶이 결코 조용하거나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안에는 치열한 자기 성찰과 수많은 내적 갈등이 있었으며, 역사적 맥락에서 영웅처럼 행동했던 순간도 있었습니다. 부모의 삶까지도 그의 내면에 한 객체로서 깊이 자리하고 있었죠.

‘평범함’이란 이 얼마나 풍부하고 복잡하며 위대한 것인가요? 이 소설은 조용히, 깊이 있게 보여 줍니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고 나니, 저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어요.

이 독서 경험을 그냥 지나치는 건 일종의 배반처럼 느껴졌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처럼, 뭐라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모로서, 교사로서 살아가는 ‘나’가 아닌, 내 안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나’는 독서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도 어쩌면 자유 시간이 많지 않기에 선택한 평범한 취미일 수도 있지만, 사회적 역할로 규정되지 않는 나의 모습을 가장 또렷이 발견할 수 있는 영역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것, 그것에 대해 쓰다 보면, 평범한 인생을 살아가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언젠가는 쓰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삶 어디까지가 ‘그저 그런’ 걸까요? '그저 그런 삶'이 존재하기는 할까요?

이런 질문을 해보니, 더운 날씨에도 힘이 납니다.


오늘도 평범하지만 은근히 특별하게 살아낸 당신,

특히 평범하다는 목요일 저녁에 이 글과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특별히 편안한 밤 보내세요.


(* 참고로 저는 매주 일요일에 메일로 사람들과 독서 편지를 나누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글을 두 달 뒤, 이곳 브런치에서 다시 발행합니다. 이 곳의 이야기는 두 달을 잠들었다가 깨어난 글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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