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편지는 조금 늦었습니다.
어제 약지를 다쳐 병원에 다녀왔거든요. 다행히 골절은 아니라고 하네요. 출혈이 가라앉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습니다.
지금은 손을 부목으로 고정한 상태지만, 독수리 타법으로라도 글을 적을 수 있어 이렇게 몇 자 남깁니다. 이번 주 편지는 쉬어 볼까 고민도 했지만, 그러면 오히려 아쉬움이 클 것 같았어요.
이 글을 쓰는 지금, 창밖에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많은 비가 걱정되면서도, 더위가 조금은 누그러지길 바라게 됩니다.
지난 금요일까지 부산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부산에는 한 번도 뵙지 못한 할아버지의 묘가 있습니다. 가 본 적은 없어도 이따금 본향처럼 마음을 끄는 곳이지요. 아버지께서 20대에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하셨던 곳이기도 합니다.
아버지가 발로 뛰던 부산과 제가 마주했던 부산은 많이 다를 겁니다. 그래서인지 이번 여행 내내 저는 ‘사라져 가는 것들’을 자꾸 떠올렸습니다. 해운대 근처에 머무는 동안, 빼곡한 고층 빌딩을 보며 청춘의 아버지가 걷던 거리를 겹쳐 보게 되었고, 그래서였는지 그리움의 감정이 부풀었습니다.
여행 중에 조갑상 교수의 『이야기를 걷다』를 읽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소설 속 부산을 저자가 직접 걸어 장소의 공간성과 역사성을 기록한 책입니다.
재미있게도 이번에 제가 밟은 부산은 낯설었는데, 책 속 부산은 오히려 친숙했습니다.
김정한의 『사하촌』, 『모래톱 이야기』의 낙동강 하구, 염상섭 『삼대』에서 이인화가 걸었던 부산역 주변, 피란 시절 예술가들의 살롱 ‘밀다원’ - 이 지명들이 마린시티, 센텀시티, 해운대, 구남로보다 제게는 더 가깝게 와닿았습니다.
마치 오래전 떠나온 고국을 다시 찾았는데, 예전 모습을 더는 찾을 수 없을 때 느끼는 그리움을 우회해서 겪은 기분이랄까요.
이야기가 건네는 공간성과 역사성의 의미를 새기면서도, '지금,여기'를 살아내려면 그 이상으로 현재의 결을 읽어 내는 시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편지를 읽고 계신 당신께서는 (제 편지를 읽는 분들을 지칭할 때 어떻게 불러야 할지 아직도 고민중에 있습니다.) 한 편의 이야기를 만날 때 어디에 생각이 오래 머무시나요?
저는 비슷한 생각을 다른 언어권의 작가도 붙잡고 있다는 증거를 발견할 때 가장 크게 끌리고, 그 생각에 오래 머물러 있는 편입니다. 한국에서, 미국에서 각기 다른 배경을 통과해도 겹쳐지는 사유를 보면, 그것이 삶의 본질에 닿은 통찰일지 모른다고 가늠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세계 여러 나라의 소설을 연결 고리의 실마리를 찾듯 읽습니다. 멀리서 출발한 선들이 한 지점에서 만나는 순간, 읽기의 기쁨은 한층 또렷해집니다.
요즘은 레프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고 있습니다.
이반 일리치가 병으로 시달릴 때, 그의 아픔을 바라보는 부인 프라스코비야 표도르브나의 시선이 제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제가 일상에서 내비친 반응과 겹쳤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언젠가 남편이 몸이 좋지 않다고 했을 때 저는 속으로
'늘 피곤하다면서 술 마시고 운동도 안 하니… 이건 스스로 자초한 결과 아닌가?' 하고 단정 짓듯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소설의 표현을 빌리자면 ‘올바른 활동’을 하지 않은 결과라는 식의 판단이었지요.
또 이반 일리치의 내면을 따라가다 보니 제 병과 관련된 경험도 되감기 되더군요. 명치가 아파 병원으로 가던 날, ‘혹시 큰 병이면 어쩌지’ 가슴을 졸이다가, 결과가 괜찮다는 말을 듣고 한꺼번에 숨을 놓던 순간 말입니다.
삶은 누구에게나 어쩌면 고통이라는 다 카포(da capo)를 반복하다가, 죽음이라는 피네(fine)에서 악보를 덮는 과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 소설 한 편 제대로 남기지 못한 제가 떠올리는 죽음의 상념도 아마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생각한 죽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문학의 공간성과 역사성을 이해한다는 일은, 결국 공간과 시간이 덮어 버린 껍질을 잠시 걷어 내어 삶의 본질과 맞닿게 하는 비계를 세우는 일이 아닐까요. 다양한 삶의 단차를 알아차릴수록 본질에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겠지요.
지난 주에는 아이들과 아이작 아시모프의 『아이, 로봇』을 읽고 가족 독서 토론을 열었습니다.
그동안 주로 그림책을 두고 이야기했다면, 이번엔 처음으로 분량이 있는 소설을 함께 완독하고 토론했습니다.
로봇과 함께하는 삶은 아마도 우리 아이들의 동시대가 되겠지요. 저는 남은 삶에서 로봇과 금세 친해지지 못해도 괜찮다고 여겨 왔습니다. 로봇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이들과 연대하며 살아가는 길도 의미 있다고 생각해 왔지요. 혹시 제 태도가 너무 안일했을까요? ^^
아이들은 아무래도 저보다 훨씬 적극적이었습니다.
특히 딸아이는 로봇 3원칙을 바탕으로 딜레마 상황을 설정하고, 가정과 반례를 들어 논리를 밀고 나가며 활발하게 의견을 주고받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저는 로봇을 대하는 저의 안일함을 거두어 들일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한 토론의 시간이 자극이자 배움이었습니다.
비 소식이 이어지지만 아직은 한여름의 기운이 가득합니다. 그럼에도 새로운 주에는 여름 속에서 가을의 기척이 스며드는 순간들이 오겠지요.
조금만 더 힘을 모아, 잔잔하고도 깊은 여름을 함께 건너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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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평안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