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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8.9. 책편지] 슴슴한 읽기, 담백한 휴식

by 겨울아이 환

지난주는 손가락을 다쳤다는 핑계로 느리게 지냈습니다.

둘째도 장염에 걸려 음식 조절을 해야 했지요. 10년 전, 떡뻥과 바나나 같은 유아식을 먹이던 시절처럼 끼니를 때우며 살았습니다.

잠시 어린아이를 키우던 시절로 돌아간 셈입니다.

입맛이 슴슴해지니 마음속 생각까지 양념맛을 뺀 듯 담백해졌습니다.

평소 잠드는 시간이 일상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스위치라고 믿었는데, 이번 주를 보내며 ‘음식’이야말로 또 하나의 스위치가 아닐까 싶더군요.


오늘까지가 전 휴가입니다.

휴가 기간 동안, 아침 일찍 일어나 글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이라는 ‘모닝 페이지 쓰기’를 시도해 보았습니다. 출퇴근 생활자에게는 엄두도 못 낼 일이었는데, 막상 해 보니 왜 하는지 알겠더군요.


눈을 뜬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직 반쯤 꿈속에 있는 듯한 상태에서는 머릿속에 덩어리처럼 떠오르는 생각들을 그저 받아 적기만 하면 됩니다. 꿈 이야기도 쓰고, 단전에서 솟구치는 타인에 대한 감정도 평소처럼 필터링하지 않고 쏟아냈습니다.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하지 못해 아쉬운 것까지 여과 없이 써 내려갔습니다. ‘아무 말 대잔치’ 같기도 하고, 약간 취한 상태에서 쓰는 일기 같았습니다. 여기에 영감과 꾸준한 훈련이 더해진다면, 작가들이 말하는 ‘뮤즈의 강림’을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하지만 닷새쯤 지나니 시들해졌습니다.


즐겁지 않으면 과감히 포기하는, 다소 도파민 의존적인 성격이라서일까요. 날씨가 조금 선선해진 날, ‘오늘 아니면 못 달린다’는 핑계로 모닝 페이지 대신 모닝 달리기를 택했습니다.


그렇게 소소한 미션들을 수행하는 사이, 손가락은 거의 다 나았습니다.

처음에는 꽤 심하게 멍이 들어서 ‘혹시 이러다 살이 썩는 건 아닐까’ 하는 과장된 상상도 했는데, 일주일이 지나니 통증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아직은 내 몸에 회복 기능이 작동하는구나 싶어, 감사 기도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일상에 작은 균열을 만들던 건강 문제도 잦아들고, 이제 남은 건 출근뿐입니다. 슬프게도, 이건 피할 수 없네요. ㅠ


지난주는 엮어 읽기 같은 읽기 계획 없이, 그저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었습니다.

이다 작가의 『도시 관찰 일기』, 보르헤스가 추천한 세계문학 단편 몇 편, 앤 그리핀의 『그 여름의 항해』, 이제니 시인의 시집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까지.

돌아보니 여름에 어울리는 잡다한 독서 목록입니다. 책들 사이에 뚜렷한 관련성은 없었지만, 가볍게 읽다 보니 진짜 휴식을 맛본 기분이었습니다.


『도시 관찰 일기』는 이다 작가님의 전작 『자연 관찰 일기』와 비슷한 형식의 일기입니다.

관찰 대상이 자연에서 도시로 확장된 것이 특징이지요. 세상을 유심히 둘러보며 걷는 산책가라면 흥미롭게 읽을 만한 책입니다. 특히 어린 자녀가 있다면 함께 읽으면 좋을 것 같아요. 초등학생인 둘째가 흥미롭게 읽더라고요.


앤 그리핀의 『그 여름의 항해』는 아이를 잃은 엄마의 방황, 그로 인한 가족 관계의 균열과 치유의 여정을 그린 작품입니다.

저는 이 작가의 전작 『모리스 씨의 눈부신 일생』을 통해 처음 노년의 삶을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된 계기도 되었지요.

아일랜드 작가의 작품인데도 우리의 정서와 잘 맞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번역의 힘일 수도 있겠지만, 이번 소설에서도 그 느낌은 이어졌습니다. 이 소설 덕분에 잊고 지냈던 아이 키우던 시절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네요.

읽으며 생각하니 저의 육아는 두려움에 가득 차 있었네요. 두려움을 걷어내는 일을 수도 없이 반복하면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니 시인의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은 언어를 치열하게 다루는 즐거움을 느끼게 합니다.

저는 늘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편안한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 좋은 글쓰기라고 생각했는데, 이 시집이 그 고정관념을 조금 바꾸어 놓은 것 같습니다.

언어를 즐기는 맛을 알게 되었다고 해야 할까요? 게다가 낭송하는 맛이 커서, 거의 한 권을 다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이렇게 지난주에 한 일을 써 놓고 보니, 손가락을 다치고도 나름으로는 바쁘게 보냈군요. 이것은 만사를 미룬 보람입니다. 대신 집안이 엉망이 되었습니다. ^^


휴가가 끝나 아쉽지만, 지난 한 주를 정리하고 나니 새로운 한 주를 맞이할 힘이 차오릅니다.

휴식이 무엇인지, 중년이 되어서야 조금씩 깨닫고 있어요. 나이 먹고 깨닫는 것들이 많네요.


일요일 저녁, 맛있는 것 드시고 또 한 주를 위해 충전하시길 바랍니다.

이번 주도 제 편지를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주에 만나요~!!!


이번 주에 함께한 책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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