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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8.23. 책편지] 자꾸만, 발견

아무튼, 쓰기.

by 겨울아이 환

글은 결코 손끝에서만 만들어지지 않겠지요. 발로 뛰며 오갔던 길이 글의 재료가 되고, 걸음걸음이 문장이 됩니다.


그 시절 아이들이 그랬듯 저 또한 어린 시절에는 일기를 매일 썼습니다. 그땐 글쓰기가 꽤 즐거웠지요. 종일동네를 누비며 놀았던 일을 편하게 적었습니다. 땅을 계속 파면 어디까지 팔 수 있나 싶어서 며칠을 근처 놀이터에 출근하여 땅을 판 일, 아빠한테 크게 혼이 나곤 집을 나가 두 어 정거장쯤 거리까지 가출한 일, 친구집에 놀러 갔다가 새로운 음식(메뚜기 튀김)을 맛본 일. 어린 시절 일기장엔 꽤 다양하고 지금 읽어 보니 재미난 일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잘 써야 한다’는 마음이 글 위에 얹히면서 글쓰기가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그럼에도 하루를 짧게라도 어딘가에 기록하는 일만큼은 지속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어린 시절 일기가 남긴 습관 덕분일 겁니다.


이제 독서레터를 쓴 지 석 달째. 글을 대하는 태도가 조금 달라졌습니다.

예전 같으면 '글쓰기의 부담스러움을 무의식적으로 느끼고 움츠렸을 텐데, 지금은 먹은 나이가 있는 만큼 작은 흔들림에 크게 휘둘리지 않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지난 광복절 연휴는 어떻게 보내셨나요?

저는 둘째와 함께 천안 독립기념관에 다녀왔습니다. 이날의 외출로 두 가지 발견을 하였습니다.


첫째, 당연히 매우 멀 것이라고 생각했던 천안이 제가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하는 안산보다 더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승용차를 이용했기 때문이겠지만, 한편 명백한 '거리'마저도 그저 숫자가 아니라 마음의 무게일 수 있다는 발견을 하였습니다.


둘째, 독립기념관에 유물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전시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전시 기법으로 정면 승부를 본 듯했지요. 방법을 잘 알고 다루면, 대단한 재료가 없어도 더욱 흥미로운 것을 생산할 수 있다는 발견도 하였습니다.


이런 경험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글로 옮겨 적다가 또 하나의 발견을 합니다. 나는 사소한 일상을 가볍게 풀어내면서도 누군가와 진지하게 나누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그리고 글쓰기가 내 안을 들여다보는 확실한 방법이라는 발견도 슬쩍 더해 봅니다.


연휴 동안 스티븐 킹의 창작론 책 《유혹하는 글쓰기》를 펼쳤습니다. 오래된 독서 기록을 보니, 10년 전 광복절에도 이 책을 읽고 있더군요.


이 책에는 다양한 작품들이 언급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읽지 않은 책이 등장하면 저는 난감해집니다.

'나중에 읽을 수도 있을 텐데, 지금 내용을 알아버리면 재미가 반감되는 건 아닐까?’ ‘중요한 대목일지도 모르는데, 쓸데없는 걱정을 하느라 이 부분을 놓치면 어쩌지?’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따라옵니다.


그러다 결국 책을 덮어버린 적도 많았습니다. 아마 예전의 《유혹하는 글쓰기》도 그렇게 읽다가 덮어두었던 듯합니다.

하지만 10년 만에 다시 읽으니 달랐습니다. 이번엔 웃음이 터졌습니다. 스티븐 킹은 ‘작가의 이력서는 재미있어야 한다’는 신념대로, 불우했던 어린 시절조차 유쾌하게 풀어냅니다.

혼자 웃기엔 아까워서 둘째를 방에서 불러 내어 소리 내 읽어주었는데, 제 웃음보다 아이의 어이없다는 표정이 더 재밌었습니다. 웃음도 세대에 따라 주파수가 다르다는 걸 또 발견했습니다.


어제는 김경욱 작가님의 산문집 《저에게 재능이 있나요?》를 읽었습니다. 한때 제가 깊이 빠져 있던 작가였지요. 책을 보자 둘째가 묻습니다.


“옻나무로 뒤를 닦아서 고생했던 그 작가 책이야?”

스티븐 킹 선생님께는 송구하지만, 둘째의 기억 속에서 당신은 그렇게 각인되어 있었습니다.

“아니, 한예종에서 글쓰기를 가르치는 작가님 책이야.”

제가 대답하자, 대학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아이는 슬쩍 방을 나가 버렸습니다. 아이들에게 대학은 중요하지만 동시에 최대한 외면하고 싶은 단어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이렇게 광복절부터 오늘까지 어쩌다 보니 소설 창작에 관한 책 두 권을 읽었습니다.


보통이라면 ‘두 작가가 공통으로 강조하는 창작론은 무엇일까’라는 결론을 내야 순리겠지요. 그러나 막상 다 읽고도 뚜렷한 공통점은 쉽게 잡히지 않았습니다.


굳이 꼽자면 몇 가지가 있었습니다.

- 고쳐쓰기의 중요성

- 일단 쓰는 행위 자체를 중시한다는 점

- 도처에서 영감을 얻는다는 점 (김경욱 작가님의 말처럼, 글은 손이 아니라 발로 쓰는 것에 가깝습니다)

- 그리고 무엇보다, 두 작가 모두 쓰기를 삶의 핵심 가치로 삼는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이 결국 글쓰기를 위해 봉사한다고 믿는 태도. 그 믿음이 두 책을 관통하는 진심이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의식해서였는지는 몰라도 이번 주는 글쓰기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흠뻑 잠긴 한 주였습니다.

독서 모임에서는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를 읽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저는 왜인지 늘 로맹 가리의 《자기 앞의 생》과 헷갈립니다. 생이 내 앞에 있느냐, 내가 그 가운데 있느냐 차이인데 말이지요. 제가 이런 걸 헷갈린다는 발견도 하였습니다.)

주인공 니나 역시 글쓰기를 즐기는 인물입니다. 삶이 힘들어도 “글로 쓰면 된다”라는 태도로 버팁니다.

우리 삶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힘겨울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니나처럼 글로 감당하는 태도는 꽤 현명한 삶의 기술로 보입니다. 이거야 말로 이번 연휴 동안의 의미 있는 발견입니다.


어제가 절기상 ‘처서’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더위의 한가운데 있네요.


그래도 어차피 떠날 여름이라면, 아직 즐기지 못한 일들을 버킷리스트에 적어 하나씩 해보는 건 어떨까요?


빙수 먹기, 밤 산책, 미뤄둔 책 한 권 마무리하기 같은 사소한 일들 말이지요. 여름이 떠나기 전, 작은 일탈 하나쯤은 계절이 덤으로 준 선물이 될 수 있습니다.


편안한 한 주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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