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기의 기술
혹시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라는 영화, 좋아하시나요?
저는 지난 몇 년간 본 영화 중 가장 자주 떠올리는 작품입니다. 일상 속 사소한 순간에도 문득 생각나서, 오랫동안 여운을 남기는 그런 영화죠.
아직 보지 않으셨다면, 자신 있게 추천드릴게요. 재미는 보증합니다.
이 영화는 특히 둥근 물체를 마주할 때마다 떠오릅니다.
베이글을 먹을 때, 녹차 한 잔을 우려내어 찻잔을 응시할 때, 세탁기 뚜껑을 바라볼 때, 심지어 봄날 제비꽃의 기하학적인 꽃차례를 볼 때도요.
그 둥근 형태를 가만히 바라보다 보면, 어느 순간 그 물성을 통과해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듯한 상상을 하게 됩니다.
다른 우주의 현실에 잠시 다녀왔다가, 다시 원래의 차원으로 돌아오는 거죠.
존재는 현재의 차원에서 가장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에, 그 여행은 아주 짧습니다.
하지만 그 짧은 이동만으로도 면역력, 근력, 기억력 같은 것들이 미묘하게 향상된 느낌을 받곤 해요.
이런 차원 이동을 반복하다 보면, 그 향상 에너지들이 점점 쌓여 일상에서 유의미해집니다.
저는 이 짧은 상상의 여행을 ‘환기’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
숨을 돌리고, 시야를 넓히고, 잠시 다른 시공간을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삶의 리듬이 달라지는 느낌이 드니까요.
빡빡하고 반복적인 일정을 소화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워킹맘인 제가 정신 건강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이 되는 방법입니다.
요즘은 녹차 한 잔을 우려내고 ‘환기’의 시간을 갖곤 합니다.
이 ‘환기’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생각나는 책이 있습니다.
미치오 카쿠의 《인류의 미래》라는 책인데요, 초강력 문과인 제가 독파한 몇 안 되는 과학책입니다.
수식이 없습니다. 우주 탐험에 관한 책인데, 두껍습니다. 하지만 제 일상과 아무 관련이 없는 책이라서 끝까지 읽지 않아도 되고, 읽다가 잠들어도 되고, 어려우면 덮어도 됩니다.
제가 이 책을 읽는다고 인류의 미래에 기여할 바도 없으며 해를 끼칠 요인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환기’라는 목적에 딱 들어맞는 무해한 책입니다.
이 책의 몇몇 페이지에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와도 잘 어울리는 대목이 등장합니다. 바로 ‘평행우주(다중우주)’에 관한 설명입니다.
(p237) 웜홀은 블랙홀을 수학적으로 분석하다가 발견되었다. 앞서 말한 대로 블랙홀은 거대한 별이 자체중력으로 수축된 천체로서, 중력이 너무 강하여 빛조차 빠져나올 수 없다. 블랙홀의 탈출속도가 빛보다 빠르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저는 현생의 블랙홀에 빠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 만일 당신이 회전하는 고리형 블랙홀에 가까이 다가간다면 시간과 공간의 엄청난 왜곡을 온몸으로 겪게 될 것이다. 수십억 년 전에 웜홀의 중력에 포획된 빛을 볼 수도 있고, 심지어는 당신의 복사본과 마주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블랙홀의 막강한 조력 때문에 온몸이 스파게티처럼 길게 늘어나다가 입자단위로 산산이 분해될 것이다. (*아, 저의 웜홀을 향한 여행은 생각보다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입자단위로 산산이 부서진다니. 하지만 블랙홀에 있어도 온몸이 부서질 것 같은 날들은 있기 마련이었습니다. 저만 그런 거 아니죠?)
(p238) 이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고리 안으로 진입했다면, 웜홀을 통해 반대편에 있는 평행우주로 내던져질 수도 있다. (*뭔가 블랙홀 같은 일상으로부터 탈출할 희망이 보이지 않나요?)
(p239) 음의 에너지를 투입하면 안정한 상태가 유지된다. (*웜홀로 가는 고리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음의 에너지가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빡빡하고 바쁜 일정을 소화하며 살다 보면 음의 에너지는 늘 충만한 법 아닌가요? 블랙홀 탈출에 대한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는 설명입니다. 이렇게 에너지를 소진해서 살다 보면 막강한 음의 에너지의 화신이 되어 탈출이 언젠가 가능할 것 같습니다.)
(p393) 우주선이 웜홀로 진입하면 양자요동에서 발생한 강력한 복사를 견뎌내야 한다. 현존하는 물리학 이론 중 오직 끈이론만이 이 복사의 양을 계산하여 생존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탈출하려면 우주선이 필요한가 봅니다. 혹시 한 대 가지고 계신가요? 전 없습니다. 우주선을 확보한다 해도 타고나면 요동을 치나 봅니다. 끈이론? 제가 머리끈은 잘 다루지만 끈이론은 아직...? 계산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동공에 지진이… 전 문과입니다. 이쯤에서 여행을 황급히 마쳐야 할 것 같군요.)
오늘 '화재'에 관한 기사를 한 편을 보게 되었습니다. 기사를 보면서, 스프링클러를 미리 점검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되었습니다.
화재가 나야 비로소 작동하는지 알 수 있다는 거였죠.
'이론 화재 예방론'에 기대어 불에 맞서는 느낌이었습니다.
우주선이 웜홀로 진입하여 양자요동을 일으키지 않는 방법을 연구하는 일(이론물리학)과 현실 사이의 간극, 화재로부터 안전하게 사는 일과 현실과의 간극.
그 간극을 떠올리며 녹차 한 잔을 들이켜던 저는 마음속 웜홀에서 비로소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 간극 너머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저를 둘러싼 수많은 다중우주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 글을 쓰기 전에 《인류의 미래》를 다시 뒤적거리며 읽어 보았습니다.
표지가 아주 예쁜 책입니다. 일상과 먼 일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 견디기의 기술이 되어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예쁜 표지는 늘 위로가 되지요.)
더위가 조금 꺾인 것 같지요?
가을 좋아하시나요? 전 무척 좋아합니다. 가을을 만끽하는 공간에서 다음 편지를 쓸 수 있길 기대해 보겠습니다.
벌써 높아지는 하늘을 보며, 행복한 한 주 보내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