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토막지식 02
본래 한나라의 군사 제도는 평민들을 일정기간 동안 징집하는 징병제를 근간으로 했습니다. 그러나 후한시대 말기로 가며 행정체계가 흔들리고 호적에 잡히지 않는 유민(流民)들이 많아지자 점차 대가를 주고 병사를 고용하는 모병제가 주류가 됩니다. 삼국지연의를 보면 처음에 유관장 삼형제가 도원결의를 한 후 병사들을 모으지요? 이게 바로 모병입니다. 소설에서야 세 사람의 명성을 듣고 의협심에 불타는 청년들이 몰려든 것처럼 묘사되었지만 그럴 리 있겠습니까.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운 시절에, 먹여 주고 재워 주고 옷도 준다 하니 병사들이 모인 겁니다.
황건의 난 이후로 무수한 호족과 군웅들이 제각기 이런 식으로 모병을 실시하여 자신들의 사병(私兵)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군소세력들이 정리되고 조조를 필두로 한 거대 세력들이 자리 잡게 되자 전쟁의 양상은 대병력을 동원한 대규모 전투로 전환됩니다. 예전에는 수천 명 규모의 군사들이 투닥투닥거렸다면 이제는 수만에서 수십만에 이르는 대군을 동원하는 전면전이 시작된 것이죠. 이런 상황에서 다수 병력을 동원하는 데 한계가 뚜렷한 모병제는 자연스럽게 쇠퇴하고 대신 세병제(世兵制)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세병제란 특정한 가구를 병호(兵戶)로 지정하고 병호의 남자들을 평생 병사로 복무하도록 하며 그 대가로 일정한 토지를 하사하는 제도입니다. 그리고 이 병호는 대대손손 세습되었습니다. 끊이지 않는 전란으로 인해 인구가 대폭으로 감소한 상황에서, 세병제의 도입은 대규모 병력 동원이라는 목적을 달성함과 더불어 병사들이 평시에 남아도는 땅을 경작하게 함으로써 나라 전체의 경제력을 강화시키는 역할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조조의 업적 중 하나로 둔전제가 꼽히는데 그게 바로 세병제의 체계화입니다. 이렇듯 세병제로 인해 국가는 예전보다 더 숙련된 군사들을 더 많이 동원할 수 있게 되었지요. (단, 촉한의 경우에는 세병제를 도입하지 않고 후한시대의 징병제를 그대로 썼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의 군사 세병제에는 특별한 점이 있었습니다. 위나 촉과는 달리 오는 호족들 간의 연합정권 성향이 강했지요. 주유니, 육손이니 하는 자들은 모두 그 지역에서 뿌리박고 살아오며 큰소리치던 대가문 출신들입니다. 형 손책이 급사하고 젊은 나이에 그 자리를 이어받게 된 손권은 그런 호족들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하고 그들의 권한을 일정 부분 허락해 주는 대신 자신의 지위를 보장받는 식으로 타협을 하게 됩니다. 그 때문에 위나 촉에서는 병호들이 중앙정부에 속해 있어 중앙정부가 대장을 임명한 후 병력을 임시로 맡기는 방식이었던 반면, 오에서는 그러한 병호들이 아예 개별 호족(또는 장수)들에게 속해 있어 사병이나 다름없었지요.
또한 이 병호들은 해당 장수나 호족의 자식들에게 그대로 물려지는 경우가 통상적이었고, 심지어 아버지의 작위를 아들이 그대로 받는 경우도 흔했습니다. 정사 삼국지 오서(吳書)를 보면 유독 누군가에게 병사를 더해 주었다거나 병사를 늘려 주었다는 서술이 자주 나옵니다. 그게 바로 이런 연유에서입니다.
이런 체계가 얼마나 한심한 것이었는지 사례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감녕의 주방에서 근무하던 꼬마가 실수를 저지르고 여몽에게 달아나는 바람에 감녕과 여몽이 대립한 적이 있었습니다. 감녕은 그 꼬마를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후 꼬마를 돌려받아 돌아옵니다. 그리고 바로 꼬마를 쏴서 죽이지요.(응?) 이에 열 받은 여몽이 어찌했냐 하면, 휘하의 병력을 동원하여 감녕에게 공격을 갔습니다. 위나 촉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병사들은 나라의 것이지 장수 개개인의 소유가 아니니까요. 그러나 동오의 병력은 장수들의 사병에 가까웠기에 이런 막장 짓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에서는 전쟁이 일어나면 각 장수들이 스스로 거느린 병호들을 징집하여 군대를 구성한 후 손권에게 달려가는 방식이었습니다. 마치 중세시대 봉건제 하의 유럽 영주들처럼요. 자연 오나라는 일관된 통솔 체계를 이루기 어려웠고, 이는 오 전체의 군사력 저하를 가져오는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전쟁에서 부하들이 죽으면 자신의 병력이 줄어들 뿐만 아니라, 평시에 땅을 경작하고 농사를 지어 자신에게 세금을 바칠 일꾼들을 함께 잃는 셈입니다. 그러니 자연스레 적과의 격돌을 피하게 될 수밖에 없었지요. 게다가 오의 장수들은 서로 자신의 군사들을 돋보이게 하려고 [빚을 내어 병사들에게 때깔 나는 옷을 입혀 주고(여몽)], [배에는 조각을 하여 장식하고 무기와 노에 꽃무늬를 그려 넣기도(하제)] 합니다. 말인즉슨 한 부대에 옷차림이나 무기 등등이 통일되지 않고 제각각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손권은 합비 전투에서 십만 대군을 동원하고도 고작 칠천 명을 거느리고 있던 장료에게 참패합니다. 그것은 물론 손권 자신의 군사적 역량 부족 탓도 있겠습니다만, 이러한 병력 동원 체계의 근본적인 한계 때문이기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손권은 합비에서 물러나다 또다시 장료의 맹공을 받아 대장 진무가 목숨을 잃고 서성은 무기마저 잃었으며 능통은 손권의 목숨을 지킨 대가로 그에게 속한 정예병 삼백 명을 죽음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이때 사서의 서술을 보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입니다. 십만 대군이 물러나는데 지휘관인 손권을 지키는 병력은 고작 천여 명에 불과했을뿐더러, 그를 지키기 위해 진무, 송겸, 장흠, 능통, 서성 등이 맞서 싸우고 또 감녕과 여몽이 병사들을 독려했으며 반장이 지원을 오고 또다시 하제가 수군을 이끌고 구원을 옵니다. 다들 완전히 따로 놀고 있어요! 손권의 목숨이 달아나지 않은 게 천행일 정도였습니다.
자. 글이 길었으니 요약하겠습니다. 삼국시대의 병력 동원 체계는 모병제에서 당시 시대상에 적합한 세병제로 전환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는 위나 촉에 비해서 중앙집권화가 부족했고 이는 군사들의 사병화를 불러와 나라 전체의 군사력을 약화시키게 되었지요. 명색이 삼국시대이면서도 오나라의 존재감이 촉이나 위에 비해 떨어지는 데는 이런 이유도 있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