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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Aug 23. 2019

제갈첨, 아버지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들

삼국지의 인물들 03

  고작 마흔한 살에 승상에 올라 나라의 전권을 한 손에 쥐었으며 가히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 일컬어질 만했던 제갈량. 하지만 그에게도 한 가지 고민이 있었습니다. 바로 자식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현대인들의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우나, 당시 사회에서 아들을 낳아 대를 잇지 못한다는 건 실로 크나큰 불효이며 그보다 큰 문제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잘못이었습니다. 심지어 사람을 죽이고도 경우에 따라서는 칭찬을 받던 시대에(하후돈은 불과 14세에 스승을 모욕한 사람을 죽여서 ‘강직한 사람이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아들이 없다는 건 어쩌면 살인보다 더한 죄라 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였지요. 

 

  이런 경우 당시의 사대부들은 대체로 첩을 들이곤 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제갈량에게 첩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예로부터 무수한 사람들이 열띤 논의를 벌였던 주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위대하고 완벽하신 승상님께서 한낱 여색을 쫓아 첩을 들였을 리 없어!’ 같은 주장이 적지 않았던 거죠. 물론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만 당시 시대상을 볼 때 첩을 들이는 건 딱히 흠 잡힐 일이 아니긴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논의도 결국 부질없는 것이, 제갈량은 결국 자식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갈량이 선택한 건 친척의 아들을 양자로 들이는 방법이었습니다. 오나라에 있었던 친형 제갈근에게는 공교롭게도 아들이 셋이나 있었지요. 그래서 제갈량은 형에게 편지를 보냈고, 제갈근은 군주인 손권에게 허락을 받은 후 둘째 아들인 제갈교를 촉한으로 보내어 제갈량에 입적시키게 됩니다.


  그런데 227년. 놀랍게도 제갈량은 늦둥이를 보는 데 성공합니다! 이때 제갈량의 나이가 마흔일곱이었고 아내 황씨의 나이도 비슷했을 것으로 추측되니만큼 현대의 시각으로 보아도 이만저만 노산이 아닙니다. 그러니 당대 사람으로서는 오죽이나 기쁘고도 뜻밖인 출산이었을까요. 더군다나 형인 제갈근은 이미 손자까지 보아 할아버지가 된 지 오래였으니 그 기쁨은 더욱 컸을 겁니다. (운명의 장난인지, 공교롭게도 그 이듬해에 제갈량의 양아들 제갈첨은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제갈량은 이토록 어렵게 얻은 자식을 끔찍이도 아꼈습니다. 형 제갈근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지요.

첨이는 지금 벌써 여덟 살인데, 총명하고 지혜로워 실로 사랑스럽습니다. 다만 너무 조숙한 바람에 큰 그릇이 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러니까 ‘형! 내 아들 무지 똑똑하거든? 머리가 너무 좋아서 오히려 걱정이야!’라는 말을 우아하게 쓴 셈입니다. 


 또 북벌로 인해 자주 집을 비웠던 제갈량은 아들에게 글을 써서 남기기도 했다. 이른바 아들을 훈계하는 글(계자서/誡子書)이라고 하는데, 그 내용을 보면 제갈량이 자식을 아끼는 애틋함이 잔뜩 묻어 나옵니다. 담박영정(淡泊寧靜)이라는 고사성어도 바로 이 글에서 유래된 바 있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제갈량은 234년에 오장원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 때 제갈첨의 나이 고작 여덟 살이었습니다.


  이후 제갈첨은 공주와 결혼하여 부마가 되고 여러 요직을 두루 경험하며 쾌속 승진합니다. 그리고 불과 서른다섯 살에 위장군(衛將軍)에 올랐으며 평상서사(平尙書事)라는 중책을 맡아 본격적으로 나랏일을 돌보게 됩니다. 실로 대단한 승진 속도라 할 만했는데 아무래도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후광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능력은 판단할 근거가 많지 않지만, 정사 삼국지에 '명성과 칭송이 실제를 넘어섰다'라고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아버지만큼 뛰어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라에 대한 충성심만은 그 또한 아버지와 같았습니다.


  263년. 위나라는 촉을 공격합니다. 촉한의 최종 방위선인 면죽을 지키는 임무가 서른일곱 살의 제갈첨에게 맡겨졌습니다. 비록 장군이라 하나 실전에서 싸워본 적은 전무했던 제갈첨. 그리고 휘하의 병력이라고는 황급히 그러모은 얼마 안 되는 병사들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놀랍게도 명장 등애를 상대로 선전했을 뿐만 아니라 한 번은 적을 격퇴하기조차 합니다. 그러나 결국 등애의 공격을 버텨내지 못하여 끝내는 패하고 말았지요. 적에게 함락되는 성 안에서 그는 장남 제갈상과 함께 나라에 목숨을 바쳤습니다.


  제갈첨이 죽은 후 며칠 지나지 않아 유선은 위나라에 항복합니다. 이로서 유비가 세우고 제갈량이 지켰던 촉한은 불과 42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제갈량은 그토록 아끼던 자식의 의로운 죽음이 안타까우면서도 또한 자랑스럽지 않았을까요. 그의 아들은 사마의의 자식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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