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9)
녀석이 억지로 안겨다 주는 수십 권의 책을 꼬박 육 개월 동안 읽은 후 혹독한 훈련을 거치고 나니 나는 어설프게나마 커피에 대해 한두 마디쯤은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내가 내린 커피를 맛본 후에 녀석은 이제 합격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처음에는 엉망진창이더니 이제는 커피 맛이 꽤 괜찮네요. 이 정도면 되겠어요.”
하지만 나는 오히려 근심이 태산이었다.
“정말 하려고?”
녀석이 심드렁하게 되물었다.
“그럼 농담인 줄 알았어요?”
녀석은 내 서점 옆의 가게를 빌렸다. 육 개월 동안이나 비어 있었다는 이유로 상당히 후려친 모양이지만 그래도 결코 적은 돈은 아니었다. 어디서 돈을 마련했느냐고 묻자 녀석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퇴직금 나와요. 어제 사표 냈거든요.”
그리고 내가 미처 놀라기도 전에 덧붙였다.
“다음 달에 서점 문 닫고 인테리어 하자고요. 그리고 지분은 5 대 5예요. 아저씨랑 나는 이제 동업자라고요. 직원이 아니라 동업자. 알겠죠?”
글쎄. 세상에는 언제나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기 마련이니까.
놀랍게도 대성공이었다. 아직 카페라는 개념이 크게 대중화되지 않았을 시절이었다. 연인들이 데이트하던 곳은 카페라 아니라 커피숍이었다. 그런 시기에 새로 문을 연 카페 겸 서점은 젊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녀석은 과거에는 허름한 매대였지만 이제는 산뜻하게 변한 카운터에 서서 손님을 응대하고 주문을 받으며 계산해 주었다. 나는 주문이 들어오면 커피를 내리고 원하는 책을 찾아다 주었다. 손발이 꽤나 잘 맞았다. 하기야 녀석은 몇 년 동안이나 서점 일을 도왔으니까. 아니, 도왔다기보다는 그때도 이미 녀석이 주도하고 있었다는 게 더 옳을지도 모르겠다.
입소문이 퍼지면서 우리 가게는 일약 명소로 발돋움했다. 그렇다고 돈을 갈퀴로 긁어모을 만큼 많이 벌었다는 건 아니다. 그래도 예전에 서점을 운영할 때보다 수익이 세 배 정도는 늘었고, 월세를 내고 나와 녀석의 인건비를 계산한 후에도 아주 약간이나마 저축을 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어때요. 제 말 듣길 잘했죠?”
언젠가 장사를 마무리하고 있을 때 녀석이 물었다. 그날따라 엄청나게 몰려든 손님들을 상대로 커피를 내리느라 녹초가 되어 있었던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그러네.”
녀석이 내게 다가오더니 오른손을 내밀었다. 의자 위에 널브러져 있던 나는 놀라서 녀석을 올려다보았다. 녀석이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뭐 선물 없어요?”
“선물?”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잖아요.”
아. 그때서야 나는 비로소 그날 손님이 많았던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녀석의 얼굴만 멀뚱히 바라보았다. 녀석은 고개를 가로젓더니 등 뒤에 감추고 있었던 왼손을 내밀었다.
“여기 선물요.”
“어.......”
나는 한참 동안이나 당황해 있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고마워.”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로 크리스마스 선물은 처음이었다. 녀석이 점퍼를 입으면서 물었다.
“배고픈데 저녁 먹으러 가요. 뭐 먹을까요?”
그런 대답은 하지 말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꽤나 놀라고 감동받아 들뜬 상태였다. 그렇기에 내 대답은 일말의 고민조차 없이 툭 튀어나오고 말았다.
“부대찌개.”
녀석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나 더 이상 무어라 말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