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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Mar 03. 2020

삼국지의 전쟁과 역병들

더 깊게 들여다보는 삼국지

  꽤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만, 코로나19바이러스의 발원지로 지목되는 중국 우한(武漢)시의 옛 지명은 무창(武昌)입니다. 삼국시대의 형주 강하군에 속한 무창현이 바로 지금의 우한이지요. 장강을 통한 내륙수로의 요충지로서 손권이 형주 일부를 차지한 후 수도로 삼았을 정도이며 지금도 인구가 천만 명을 넘는 대도시입니다.  


  과거 중국대륙의 한족들은 딱히 장강 이남(강남)으로 진출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입장에서는 평탄하고 농사 잘 되는 중원을 내버려 두고 굳이 밀림으로 뒤덮인 미개척지인 강남까지 내려갈 이유가 없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장강 남쪽에는 이른바 만(蠻)이니 산월(山越)이니 하는 이민족들이 다수 거주하였지요. 거대한 장강이 중원의 한족과 강남의 이민족들을 갈라놓는 경계 역할을 했습니다. 춘추전국시대 당시 초나라는 삼국시대로 치면 형주 중부쯤에 위치하였는데, 실제로 당시 타 국가들은 초나라를 오랑캐의 국가라 부르며 얕잡아보곤 했습니다.  


  그러나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이후로 한족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점차 장강 일대와 강남까지 한족이 진출합니다. 그래서 삼국시대에는 장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족들이 다수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강은 풍토병의 온상지나 다름없었습니다. 장강 일대와 그 이남 지역에서 툭하면 역병이 돌았음이 사서에도 다수 기록되어 있지요. 그러다 보니 북쪽에서 내려온 한족들은 끊임없이 역병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원래부터 그 땅에 살아온 사람에게는 풍토병에 대한 면역력이 어느 정도 있었겠지만 생판 다른 곳에서 온 사람은 그렇지 않았을 테니까요. 


  특히 대규모 전쟁이 잦았던 시기에는 그런 역병의 발발 또한 잦았습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한 번 전쟁을 치르면 적게는 수천에서 많게는 십만 단위의 대병력을 동원합니다. 그런 병력들은 대부분 좁아빠진 막사에서 함께 거주해야 했지요. 또 한데 모여서 밥을 먹었고, 전장에서는 적의 피를 뒤집어쓰기도 했습니다. 더군다나 위생 관념이 희박한 수준이었던 시절입니다. 전염병이 전파되기에 그야말로 최적의 조건이었습니다. 


   물론 모든 역병이 강남 일대에서만 생겨난 건 아닙니다. 또 전쟁 중에만 발병한 것도 아니지요. 그러나 상대적으로 장강 일대의 전쟁에서 역병이 유행한 사례가 많은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병은 종종 전쟁 전체의 승패를 결정지을 만큼 큰 영향을 끼치기도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역병은 실로 나라 전체에 크나큰 위협이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삼국지에 언급된 역병 사례 중 몇 가지를 찾아보았습니다. 덧붙여 요즘 같은 시국에는 마스크를 꼭 착용하시고, 외출 후 손 씻기를 생활화하는 등 위생에 신경을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1) 208년 적벽대전(겨울)]


  조조의 대군과 유비-손권 연합군이 맞선 이 싸움에서 조조는 크게 패했습니다. 게다가 군중에 크게 역병이 돌기도 했지요. 결국 조조는 패퇴하여 북쪽으로 물러났습니다. 당시는 겨울철이었는데, 인플루엔자나 코로나 등의 여러 바이러스들은 대체로 춥고 건조한 날씨에 크게 유행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위서 무제기, 촉서 선주전)


 


 [2) 215년 2차 합비 전투]


  유비와의 이른바 익양 대치를 끝낸 손권은 대군을 휘몰아 합비를 공격합니다. 감녕, 여몽, 장흠, 능통 등 최고의 무장들이 수행했으며 병력은 호왈 십만에 달했습니다. 반면 합비를 지키는 병력은 고작 7천에 불과했지요. 합비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장료는 오히려 800 결사대를 이끌고 손권의 본진을 공격하여 그야말로 박살을 내 버립니다. 손권은 사기가 크게 떨어진 데다 역병까지 유행하는 바람에 고작 십여 일 만에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오서 감녕전)


 


 [3) 216년~217년 2차 유수구 전투 (겨울~봄)]


  조조는 대군을 동원하여 손권을 공격합니다. 손권은 장흠과 여몽을 중심으로 맞서지요. 이때 하후돈과 장패의 군사들이 거소라는 곳까지 진격하였으나 군중에 크게 역병이 도는 바람에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게 됩니다. 이때 종군하였던 사마랑(사마의의 형)은 직접 군사들을 돌아보며 약을 챙기지만 그 바람에 자신이 병에 걸려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조조는 손권의 방어를 뚫지 못한 채 물러났습니다. 또 돌아오는 길에 왕찬도 병사했습니다. 


 (위서 사마랑전, 위서 왕찬전)


 


 [4) 222년~223년 조비의 1차 남정 (가을~봄)]  


   이릉전투가 끝난 후 조비는 친히 나서서 손권을 공격합니다. 대군을 세 갈래로 나누어 동구, 유수구, 강릉 등을 한꺼번에 공격하는 대대적인 정벌이었지요. 그러나 조비는 결국 손권의 방어를 뚫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군중에 역병이 대대적으로 돌아서 조비는 반년이 넘는 전쟁을 치르고도 아무런 소득 없이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위서 문제기)


 


 [5) 234년 4차 합비 전투(여름)]


 손권은 제갈량의 마지막 북벌에 때맞춰 시일을 정한 후 대대적으로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손권 자신이 직접 군사들을 통솔하여 합비로 진격하였으며 주연과 전종을 각기 좌우독으로 삼았지요. 하지만 다른 방면의 군사들이 모두 패퇴한 데다 관리와 병사들 사이에 병이 돌았습니다. 게다가 위나라의 황제 조예가 직접 합비로 내려온다는 소식까지 들은 손권은 성을 미처 공격해 보지도 못하고 시무룩하게 돌아왔습니다. 혹자는 이 형편없는 패배가 제갈량에게 정신적 충격을 주어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오서 주연전)


 


 [6) 253년 5차 합비 전투 (여름~가을)]


 오나라의 실권을 손아귀에 넣은 제갈각은 합비를 공격합니다. 그러나 하필 군중에 역병이 크게 돌았습니다. 각 진영의 장수들이 총사령관인 제갈각에서 보고하기를 병든 자가 많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제갈각은 그 보고를 거짓으로 간주하고 오히려 부하들의 목을 베려 하는 추태를 보입니다. 그러나 병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우겨 봤자 현실이 바뀔 리 있겠습니까. 결국 제갈각은 합비를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해 겨울에 정적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오서 제갈각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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