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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Mar 04. 2020

손권의 거짓 항복과 세 번의 승리

더 깊게 들여다보는 삼국지

  사항계(詐降計). 거짓 항복으로 적을 속이는 수법으로 손자병법에도 등장할 만큼 유서가 깊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효과적이기도 했지요. 삼국시대의 거짓 항복 중 가장 유명한 사례는 아마도 208년 적벽대전에서 황개가 꾸민 계책일 겁니다. 그의 거짓 항복과 연계한 화공(火攻)은 적벽대전의 승리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삼국지를 읽어보신 분들은 다들 잘 아실 내용이니만큼 굳이 그 이야기를 되풀이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손권은 그 성공에 상당한 인상을 받았던지, 이후로도 두 번이나 더 거짓 항복을 써먹습니다. 세 번 모두 상대는 위나라였죠. 같은 전략에 세 번이나 연속으로 당하는 사람이 대체 어디 있나 싶지만, 놀랍게도 손권은 세 번 다 성공했습니다.



   적벽대전으로 조조의 파죽지세가 꺾이자, 이미 강남 일대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한 손권은 장강 이북을 넘보았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수차례에 걸쳐 벌어진 합비 전투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전투는 손권의 패배로 끝났지요. 심지어는 호왈 10만 명이나 되는 대군을 동원하고도 고작 적 병력 칠천을 상대로 대패한 적도 있을 정도입니다. 
 
   거듭된 패배에도 불구하고 손권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정면승부는 모조리 실패하였기에 더 이상 가망이 없어 보였죠. 그래서 손권은 마침내 거짓 항복 계책을 꺼내듭니다. 과거 크게 효과를 거두었던 바로 그 계책을 말입니다. 
 
   228년 여름, 당시 대사마(大司馬)로서 위나라의 모든 무장들 가운데 가장 지위가 높았으며 국가의 동남쪽 방면 국경을 총괄하고 있었던 조휴는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놀랍게도 주방이라는 자가 항복을 청해온 것이었죠. 당시 국경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적에게 항복하는 자가 드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방은 파양태수에다 소위교위로 임명되어 있어 지위가 상당한 편이었습니다. 게다가 연달아 일곱 통이나 보내온 그의 편지는 하나같이 공손했으며, 손권이 군사 대부분을 북쪽으로 보내는 바람에 수도인 무창 근처에는 병력이 얼마 없다는 중요한 정보가 담겨 있었습니다. 
 
   조휴는 고민을 거듭합니다. 그런데 마침 그에게 첩보 하나가 들어왔습니다. 손권이 보낸 사자가 무슨 까닭인지 주방을 크게 질책하였고, 그 바람에 주방이 무릎을 꿇고 머리마저 풀어헤친 채 사죄해야 했다는 거였죠. 마침내 마음을 정한 조휴는 군사를 크게 일으킵니다. 뿐만 아니라 황제 조예에게도 상표하여 중앙의 지원군까지 받아내지요. 조예는 형주 방면의 사마의에게도 명하여 일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강릉을 공격하도록 합니다. 바야흐로 대규모 전쟁이 벌어질 찰나였습니다. 
 
   그러나 위풍당당하게 진격해 간 조휴가 마침내 약속장소에 도달했을 때, 그를 기다리던 건 육손, 주환, 전종이 이끄는 오나라 부대였습니다. 주방의 항복은 속임수였던 겁니다. 조휴는 전투를 벌이지만 중과부적으로 후퇴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나라는 기껏 잡은 고기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날 밤, 석정이라는 곳에서 숙영하는 조휴의 병력을 오나라가 덮쳤습니다.
 
   조휴는 하마터면 목이 달아날 뻔 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부하 왕릉이 죽을힘을 다해 그를 구원한 후 포위망을 뚫었지요. 게다가 평소 조휴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가규가 급히 달려와 도와주었습니다. 그 덕택에 조휴는 간신히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1만 명에 달하는 병력과 엄청난 물자를 상실한 후였죠. 그나마도 가규 덕분에 전멸을 피할 수 있었지만 상당한 피해임은 부정할 수 없었습니다. 전쟁은 오나라의 대승으로 끝났습니다. 
 
   그럼에도 황제 조예는 그를 질책하지 않고 오히려 예우를 더하며 위로해 줍니다. 조휴가 조진과 함께 황실의 친족으로 위나라를 떠받드는 기둥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나 조휴는 너무나 분하고 부끄러운 나머지 결국 병에 걸려 드러눕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지요. 
 
   이듬해에 손권은 자신이 황위에 올랐음을 선언합니다. 
 



   231년. 거짓 항복으로 두 차례나 크게 이득을 보았던 손권은 또다시 거짓 항복을 시도합니다. 정말이지 징하네요. 이번에는 중랑장으로 있던 손표라는 자가 나서서 위나라의 양주자사 왕릉에게 항복을 청했습니다. 예. 바로 조휴를 구출했던 그 왕릉입니다. 그런데 과거 자신의 상사였던 조휴가 거짓 항복에 속아 그 치욕을 당한 걸 보고도 왕릉은 속아 넘어간 모양입니다. 그래서 손포가 군대를 보내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청하자 당장 응낙했습니다. 
 
   하지만 왕릉 자신의 판단만으로 동원할 수 있는 병사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 위나라 동남방의 군사 대부분은 조휴의 후임으로 임명된 정동장군(征東將軍) 만총의 지휘 하에 있었거든요. 그는 만총에게 병사를 내달라고 요청했지만, 만총은 그 항복이 거짓이라 판단하여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만총이 황제의 부름을 받고 수도로 올라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왕릉이나 혹은 그 부하들이 조예에게 표를 올려 만총이 게으르고 술을 좋아하며 또 늙어서 정신이 흐릿하다고 참소했기 때문이라 하네요. 전후 사정을 따져보면 출격을 허락받지 못한 왕릉이 상관을 헐뜯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일단 황명이 내려진 이상 만총은 반드시 따라야만 하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만총은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왕릉이 헛짓거리를 할까 무척 우려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부관을 불러, 무슨 일이 있어도 병력을 내주면 안 된다고 당부했습니다. 부관은 그 말을 충실히 따랐지요. 결국 만총이 없음에도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한 왕릉은 자신의 직속인 병력 칠백 명만을 보내 손포를 돕도록 했습니다. 
 
   물론 거짓 항복이었습니다. 손권이 대군을 숨겨둔 채 적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왕릉은 군사 절반을 잃은 후 도망쳤습니다. 그러나 위나라 전체의 입장에서 보면 만총의 적절한 대응 덕택에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던 셈입니다. 
 



   이렇게 손권은 거짓 항복으로 무려 세 번이나 연속해서 승리했습니다. 심지어 첫 번째는 무너질 뻔했던 나라를 구원한 엄청난 승리였고 두 번째는 손권을 아예 황제로 만들어준 승전이었습니다. 아쉽게도 세 번째는 약간의 이득을 거둔 정도에 그쳤지만 앞서의 두 번만 해도 어마어마한 전과입니다. 실로 거짓 항복 덕분에 오나라가 부활할 수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손권은 일평생 많은 패배를 겪었습니다. 특히 합비에서는 수차례에 걸쳐 형편없는 패전을 거듭했지요. 그런데도 손권은 결국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조예, 유선과 어깨를 나란히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거짓 항복이야말로 손권의 평생에 걸친 회심의 비책이었던 게 아닐까요. 만약 세 번째 거짓 항복까지 대성공으로 끝났더라면, 어쩌면 우리가 아는 삼국시대의 결말은 지금과 같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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