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울증에 걸린 공무원입니다 02
어느 순간인가부터, 머리가 멈추기 시작했습니다.
작년 중반부터 직장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속한 부서도, 제가 이끄는 팀도 폭풍 같은 소용돌이 속에 내던져졌지요. 이미 예정된 일이었기에 미리 각오하지 않은 바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폭풍이 생각보다 거세더군요. 해야 할 업무는 빗줄기처럼 쏟아졌고, 스트레스는 사방에서 온몸을 난타했습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야만 간신히 한 걸음씩 전진할 수 있는 지경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순간인가부터 제 안의 무언가가 삐걱대고 있었습니다. 결정이 느려지고 기억력이 떨어진 게 느껴졌습니다. 종종 잘못된 판단을 내렸고,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기본적인 실수를 연달아 저지르기까지 했죠. 분명히 저는 어딘가 고장이 나 있었습니다.
대체로 무슨 일이 떨어지든 빠르게 판단을 내려서 처리하는 게 직장에서의 제 장점이었습니다. 그 점을 인정받아 나름대로는 중요한 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 위치에 걸맞게 일을 처리했다고 자부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즈음의 저는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직원들은 저의 결정을 요청해왔지만 막상 저는 제가 내리는 판단이 항상 의심스러웠습니다.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 사라져 버렸고, 그랬기에 오만가지 일들을 죽자 살자 끌어안고 어떻게든 해결하기 위한 헛된 노력만을 기울였습니다. 마치 쳇바퀴를 맴도는 다람쥐처럼.
늦은 가을쯤엔가 친구를 만나 술잔을 기울인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업무의 과중과 고단함을 토로했지요. 녀석은 특유의 심드렁한 표정으로 저를 물끄러미 보더니 물었습니다.
“너는 만날 입으로는 편하게 쉬고 싶다고 말하면서, 왜 실제로는 승진에 미친 놈처럼 일하는 건데?”
글쎄. 왜였을까요.
보상? 의무감? 명예? 인정욕? 자부심? 충족감?
모를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저는 생각했습니다. 나는 이제 할 만큼 했다고. 더는 못 버티겠다고. 연말이면 무조건 다른 부서로 가겠다고. 한직에서 푹 쉬고, 다음 일은 다음에 생각하겠다고.
물론 그렇게 하면 그때까지 힘겹게 쌓아올린 근무성적평정, 말하자면 승진 점수가 확 떨어지면서 서열도 한참 뒤로 밀려버릴 상황이었습니다. 그걸 다시 끌어올리려면 적어도 2년, 넉넉잡아 3년쯤 걸릴 거라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승진이고 나발이고 더 이상은 알 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제 자리를 원하는 사람이 족히 한 다스는 될 터였으니 저만 결심한다면 떠나는 게 아주 어렵지만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 연말까지만 하자. 저는 그렇게 머릿속으로 결론 내렸고, 아주 약간이나마 기쁨을 느끼면서 술을 마셨습니다.
연말에 저는 부서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승진이라는 형태로.
희한한 일이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봐도 저는 단언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이 인사권자였다면 절대 저를 승진시키지 않았을 것이라고요. 하지면 현실은 반대였습니다.
기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죠. 정말 좋았습니다. 그간의 고통을 일거에 보상받은 기분이었습니다. 인사 발령이 나고, 저는 부서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몸 상태도 정상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지요. 나중에서야 착각이었다는 걸 알았지만 말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이겠지만 부서장에게는 더 많은 권한과 함께 더 많은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려야 하는 결정의 무게는 더욱 무거웠습니다.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일이 있었고 하기 싫지만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업무가 있었고 이제 마무리해야 하는 업무가 있었으며 새로이 바꿔야 하는 업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는 기대에 부응해야만 했습니다. 이 사람이 일을 잘 해낼 것이라는 윗사람의 기대. 이 사람이 일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줄 것이라는 아랫사람의 기대. 그 안에서 결정은 더욱 어려워졌고 저의 결정에 수반되는 부담감은 점점 더 커져 갔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런 기대 자체가 단지 제 상상 속에만 존재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승진을 했거나 말거나 저는 결국 흔해빠진 일개 공무원 나부랭이일 뿐이지 않습니까. 그 누구도 제게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 따위를 준 적이 없고, 인류 공영에 이바지하라고 강요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문제는 아마도 저 자신에게 있었을 겁니다. 마치 온 세상의 짐을 다 짊어져야만 하는 것처럼 스스로를 몰아넣은 저 자신에게 말입니다.
굳이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덧붙이지는 않겠습니다. 그저 새로운 일에 수반되는 업무가 무척이나 고되었고, 그걸 처리하는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몹시 심하게 받았다는 정도면 대충 요약되겠지요.
제가 정말로 고장이 나기까지는 딱히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