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울증에 걸린 공무원입니다 04
처음 가 본 정신의학과는 제가 막연히 생각하던 이미지와는 꽤 달랐습니다. 무엇보다도 뜻밖이었던 건 대기실에 사람이 상당히 많더군요. 마음이 아픈 사람이 이렇게 많은가, 하고 놀랄 정도였습니다. 그중에서도 비교적 젊은 축에 드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어두운 얼굴로 조용히 앉아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반면 연세가 있는 분들은 무언가 자꾸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더군요.
접수를 하자 카톡을 통해 몇 가지 심리 테스트를 보내 주었습니다. 연필을 들고 두툼한 종이 위에 번호를 체크해야 할 거라는 예상과는 전혀 달랐지요. 있는 그대로 대답을 한 후, 잠시 대기하자 차례가 되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 의사와 면담에 들어갔지요.
의사분은 치분하고 어딘가 살짝 멍해 보이지만, 동시에 신뢰가 가는 인상이었습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엉거주춤 자리에 앉자 의사가 어떤 일로 왔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원래 말이 상당히 빠른 편입니다. 하지만 그날은 느릿하게, 그리고 자주 더듬거리면서, 제 증세를 설명했습니다. 뭔가 좀 이상하다.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일 생각이 맴도는데 도저히 자제가 안 된다. 그리고 내가 죽는 상황이 자꾸만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걸 실행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그 상황이 떠오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생각의 고리를 도저히 끊을 수 없다. 이러다 뭔가 큰일이 날지도 모르겠다는 불안에 이렇게 찾아왔다.
제 요령부득인 설명을 의사는 주의 깊게 들었습니다. 그러고는 몇 가지 질문을 덧붙인 후, 당장 진단을 내릴 수는 없지만 일단은 우울과 불안 증세가 보이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일단 좀 쉬는 게 어떻겠냐고 말하더군요. 저는 지금 업무상, 위치상 자리를 비울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의사는 신중하게 단어를 골라 가며 차분히 말했습니다.
"물론 환자분의 선택을 제가 강요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지금은 분명히 휴식이 필요해 보이는데요. 죽고 사는 것보다 심각한 문제는 없지 않습니까."
그렇죠. 분명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고개를 저었습니다. 왜였을까요?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그 또한 우울증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부서장이 며칠 휴가를 내는 건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거든요. 그런데도 저는 제가 출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출근해서 제 의무를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날 정신의학과에서 두 가지 약을 처방받았습니다. 하나는 당장의 상태를 완화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장기적으로 상태가 나아지는 약이라고 설명을 들었습니다. 특히 두 번째 약은 적어도 2주에서 길게는 6주가 지나야 효과가 나타나니 절대로 도중에 끊으면 안 된다는 당부와 함께였습니다. 나중에 따로 찾아보니 전자는 흔히 신경안정제라고 부르는 벤조디아제핀, 후자는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인 에스시탈로프람이라는 성분이더군요. 성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언급할 기회가 있겠지요.
정신의학과 약은 병원에서 바로 내줍니다. 약을 받아들고 병원을 나오니 온갖 생각이 들더군요. 이걸로 나는 의학적으로 공인된 정신병자가 된 걸까, 하는 서글픈 마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사실 안도감이 더 컸습니다. 이걸 먹으면 지금보다 나아질 수 있다는 기대감에서 비롯된 안도감 말입니다. 유감스럽게도 그 안도감은 얼마 가지 못했습니다.
그 주 주말에 꽤나 대규모로 친척 모임이 있어서 다른 도시로 이동했습니다. 그때쯤 제 정신 상태는 최악으로 치달았습니다.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꾸벅꾸벅 졸았는데,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본능적으로 일 생각이 나더군요. 앞서도 언급했던 업무-잘못-처벌-죽음으로 이어지는 고리가 머릿속에서 더욱 강렬하게 회전하고 있었습니다. 역에서 내려 렌터카를 운전해서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그리고 고기와 횟감으로 거하게 잔치를 벌이는 동안, 저는 겉으로는 최대한 멀쩡하게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속으로는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았습니다. 그날 밤에 일어난 불쾌한 일을 수습하면서 제 정신상태는 더욱 끔찍해졌지요.
2박 3일의 일정 내내 저는 몸과 마음이 분리된 기분이었습니다. 제 몸은 사람들을 따라다니면서 웃고 떠들고 대화하고 있었지요. 하지만 제 정신은 거기 있지 않았습니다. 어딘가 외따로 떨어진 곳에서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지요. 운전도 제대로 안 되고 자꾸만 거칠어지더군요. 가족들과 함께 이런저런 관광지를 잔뜩 돌아다녔는데, 사실 그 때의 기억이 거의 나지 않습니다. 심지어 나중에 사진을 보아도 생경하기만 하더군요. 내가 이런 데를 갔다고? 이런 식으로 사진을 찍었다고? 전혀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데 사진 속에는 제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기억의 편린으로 남은 일정이 끝난 후, 월요일이 되어 저는 출근했습니다. 너무나 끔찍했던 주말이었기에 뭔가 큰 사달이 날 것만 같은 불안감과 함께요. 아침에 세수를 하면서 단속적으로 호흡 곤란이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날은 별 일 없이 평온하게 흘러갔습니다. 저는 해야 할 일을 했고, 퇴근시간이 되어서 퇴근했습니다. 이제야 약빨이 받는 것 같다고 혼자 짐작하면서요.
다음날은 제 일평생 최악의 하루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