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곰 May 13. 2023

쉬었지만 여전히 좋지 않았습니다

나는 우울증에 걸린 공무원입니다 06

그날 바로 병원에 전화해서 예약을 오늘로 바꿔 달라고 애원하다시피 했습니다. 제 목소리가 심상치 않게 들렸는지, 그날 오후에 바로 진료를 잡아 주더군요. 조퇴를 하고 바로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검사 후 면담 자리에 앉았을 때 저는 계속해서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그날 벌어진 발작 비슷한 상황에 대해 설명하자 의사가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습니다. 저는 있는 대로 대답했고 의사는 아무래도 과도한 긴장과 불안이 뒤섞인 상태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저는 하루 중에서도 아침이 제일 힘들고 저녁에는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라고 했습니다. 의사는 제 상태에 대한 대응으로 벤조디아제핀의 복용량을 두 배로 늘렸고, 거기다 아침에 복용할 분량을 추가로 처방해 주었습니다. 며칠 동안 우울증에 대해 검색해 볼 기회가 있었기에 저는 혹시 종합심리검사, 흔히 말하는 풀패키지 검사 같은 걸 받아볼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마침 병원 입구에도 여러 가지 심리검사와 비용에 대한 안내가 붙어 있었거든요. 그러나 뜻밖에도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설명했습니다. 


"할 수는 있지만 지금 상태로 보면 결과는 당연히 안 좋게 나올 겁니다. 지금은 증세를 치료하는 게 먼저고 비용이 많이 드는 검사는 나중에 필요할 때 해도 괜찮습니다. 그보다는 지금은 쉬는 게 좋겠는데요."


왠지 신뢰감이 드는 대답이었습니다. 


저는 이어지는 수목금 사흘 동안 일시적으로 휴가를 냈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두 배로 늘어난 약을 꾸준히 먹었지요. 하지만 증세는 쉽게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당장 수요일 아침부터 눈을 뜨자마자 몹시 괴롭고 힘들더라고요. 아침용 약을 먹은 후 한 시간 가량 멍하게 소파에 앉아 있자니 조금씩 상태가 나아졌습니다. 마침 오랜만에 날이 맑아서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걸 실천으로 옮기는데 또다시 상당한 시간이 걸렸지만, 마침내 어영부영 밖으로 나오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우울증이 몸에까지 영향을 미쳤는지 제 체력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평소라면 가뿐하게 올랐을 언덕길이 이상하게 힘들고 고되게 느껴지더군요.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이제 포기하고 집으로 가자는 유혹이 들었습니다. 좀 민망한 이야기지만 저는 그런 생각을 떨치기 위해서 제가 살아가야만 하는 이유를, 다시 말해 아내와 딸아이의 이름을 입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한 걸음 한 걸음씩 걸어갔습니다. 


불과 삼사십 분 가량을 천천히 걸었을 뿐인데도 더 이상은 걷기 어려워서 한참을 쉬다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땀이 나지 않았다는 핑계로 샤워는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실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욕실에 들어가는 게 너무 무서웠거든요. 그때 저는 불안감의 극에 달해 있었고, 욕실에 들어가 샤워기를 보면 혹시라도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을까 두려웠습니다. 스스로에게 확신이 전혀 없었기에, 씻는 대신 그대로 소파에 쓰러져서 잠들었습니다. 




눈을 뜨자 두어 시간쯤 흐른 후였습니다. 자고 나서 그런지 상태가 좀 괜찮더군요. 그래서 얼마 후 퇴근할 아내를 데리러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차를 몰고 일찌감치 길을 나섰지요. 버스 뒤를 들이받고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내비게이션 화면에 띄워 놓은 아이의 사진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가는 길에 공무원이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보자 갑작스레 가슴이 쿵쾅쿵쾅 뛰더군요. 그러고 보니 그 전날에는 유명한 유튜버인 충주시 공무원 이야기를 듣고도 상태가 안좋아졌던 기억이 났습니다. 꼴사납게도 공무원이라는 제 직업 세 글자가 저를 압박하고 있었습니다. 


크게 숨을 들이마신 후 내뱉고는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습니다. 음악을 들을까 싶은 생각도 있었지만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언젠가인가부터 제가 운전하면서 음악을 듣고 있지 않았더군요. 원래는 좋아하는 음악을 켜 놓고 고래고래 따라부르면서 운전하는 게 제 평소 모습이었는데 말입니다. 언제부터였는지를 따져 보니 얼추 제 상태가 나빠졌던 때와 맞물리는 것 같았습니다. 절로 쓴웃음이 나더군요. 그런 식으로 제 정신상태가 표출되고 있었다는 것이, 그리고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는 사실이 씁쓸했습니다. 


주의를 기울이며 운전한 끝에 아내의 회사에 도착했습니다. 퇴근한 아내를 태우고 출발했지요. 아까 보았던 플래카드를 피하기 위해 일부러 조금 돌아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오는 동안 제 상태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아내는 저보다 좀 단단한 성향입니다. 그래서 저더러 온실 속 화초라고 종종 놀리기도 하죠. 솔직히 인정합니다. 아내는 무척이나 힘든 일을 겪었을 때도 겉으로 잘 드러내지 않았고, 마치 잡초처럼 끈질기게 버텨서 극복해낸 사람이었거든요. 그래서 저는 당신도 힘든 일을 겪은 걸 잘 아는데 나만 이렇게 증세가 나타나서 미안하다고 사과했고, 아내는 오히려 저를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본인이 겪었던 힘들었던 일과 극복해낸 경험담도 들려 주더군요. 


결혼을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내가 저보다 강한 사람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부럽다는 생각이 함께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내를 위해서라도 빨리 나아져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전 05화 결국 발작이 일어났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