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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Sep 02. 2019

'한중왕표'로 알아보는
유비 부하들의 서열

삼국지 토막지식 04

  유비가 조조를 격퇴한 후 한중왕에 오를 때, 부하들이 함께 연명으로 황제(헌제)에게 표를 올립니다. 유비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니 왕으로 삼아 주시라는 내용이죠. 물론 조조의 제어 하에 있는 헌제가 그걸 승낙할 수 있을 리 만무합니다만 일단 그런 식으로 모양새를 만들었습니다. 유비가 한 황실의 정당한 후예임을 강조한 이상 그런 정치적 제스처는 매우 중요하니까요. 


  다만 오늘 이야기하려는 건 그 표문 자체가 아니라 서두 부분입니다. 소위 '한중왕표'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촉서 선주전] 평서장군(平西將軍) 도정후(都亭侯) 신(臣) 마초, 좌장군장사(左將軍長史) 영 진군장군(領鎭軍將軍) 신 허정, 영사마(營司馬) 신 방희, 의조종사중랑(議曹從事中郎) 군의중랑장(軍議中郎將) 신 사원(射援), 군사장군(軍師將軍) 신 제갈량, 탕구장군(盪寇將軍) 한수정후(漢壽亭侯) 신 관우, 정로장군(征虜將軍) 신정후(新亭侯) 신 장비, 정서장군(征西將軍) 신 황충(黃忠), 진원장군(鎭遠將軍) 신 뇌공, 양무장군(揚武將軍) 신 법정, 흥업장군(興業將軍) 신 이엄 등 120명이 삼가 상언합니다.


  여기에서 당시 유비의 휘하에 있던 부하들의 서열이 어찌 되는지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우선 마초가 가장 앞에 있네요. 도정후는 본래 조조로부터(=즉 황제의 이름으로) 받은 작위입니다. 하지만 평서장군은 유비가 임의로 부여한 장군직이지요. 아무튼 그의 이름이 가장 앞에 등장한 사실로 미루어보아 마초가 유비로부터 제후 대접을, 적어도 겉보기상으로는 동등한 입장으로 대우를 받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부하라기보다는 객장(客將)에 가까운 셈이지요. 마치 유표 휘하에 있을 때의 유비 자신처럼요. 


  배주에서 배송지가 인용한 산양공재기(山陽公載記)를 보면 마초가 유비의 자(字)를 부르며 맞먹으려 드니 관우와 장비가 화가 나서 마초를 죽이려 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물론 배송지 자신이 그럴 리 없다며 부정했지만, 그만큼 사람들이 마초의 격이 유비와 맞먹을 정도였다고 여겼다는 방증이 될 수 있습니다.   


   이후에 나오는 이름은 허정과 방희, 사원입니다. 허정은 상당히 유명하고, 방희는 그럭저럭 이름 정도는 기억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원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은 사람이지요. 이들의 직책은 각각 장사(長史), 사마(司馬), 종사중랑(從事中郎)입니다. 


   유비가 한나라로부터 받은 공식적인 직함은 좌장군(左將軍) 의성정후였고, 그 권한으로 부(府)를 개설하여 부하들을 좌장군부(左將軍府)에 배치하는 식으로 인사권을 행사하게 됩니다. 원칙적으로 보좌관격인 장사와 사마를 한 사람씩 둘 수 있는데 장사는 조직 및 인사담당이고 사마는 군사 담당이라고 생각하시면 대충 맞아떨어집니다. 그리고 장사 아래에 여러 조(曹. 조선시대에 호조 병조 할 때의 그 조입니다.)를 두고 이 조에 종사중랑을 배치합니다. 이들의 이름이 먼저 나오는 건 뒤에 나오는 사람들보다 지위가 높아서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허정이나 방희는 몰라도, 고작 의조중사중랑에 군의중랑장인 사원이 뒤에 나오는 무수한 장군들보다 윗길이라는 건 말이 안 되거든요. 


   아마도 이들은 유비의 좌장군부에 속한 직속 부하들이었기에 이름이 먼저 나오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장사와 사마는 각기 좌장군의 왼팔과 오른팔격이니 당연히 나와야 할 테고, 사원은 여러 부에 있는 무수한 종사중랑들 중 선임자라고 저는 추측합니다. 사원은 훗날 좨주가 되었다가 승상부의 종사중랑이 되었으니 역시 고위직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부터 본격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이 나옵니다. 


   군사장군 제갈량, 탕구장군 관우, 정로장군 장비, 정서장군 황충, 진원장군 뇌공, 양무장군 법정, 흥업장군 이엄, 기타 등등...


   가장 흥미로운 건 역시 제갈량의 위치입니다. 관우나 장비보다 앞에 있어요. 유비가 적벽에서 승리하고 형남 네 군을 차지했을 때 제갈량의 지위는 군사중랑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익주를 차지한 후 군사장군으로 승진하면서 관우나 장비보다 지위상으로 앞서게 된 거지요. 생각해 보면 제갈량이 유비에게 출사한 206년 이후 유비가 익주를 차지하기까지 고작 8년이 지났을 뿐입니다. 그런데 유비는 고작 삼십 대 중반인 제갈량을, 근 삼십 년 가까이 자신을 따랐으며 형제와도 같은 정이 있었던 관우와 장비보다 더 높은 지위로 임명한 겁니다. 심지어 제갈량에게 좌장군부의 일을 대리하도록(署左將軍府事) 하기도 하지요. 제갈량에게 제이인자의 도장을 꽝꽝 찍어준 셈입니다. 유비의 제갈량에 대한 믿음은 실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물론 다들 아시다시피 제갈량은 그 기대에 십분 부응했지요. 


   이후 관우와 장비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으니 넘어가겠습니다. 


   그들 다음에 황충의 이름이 나오는 게 흥미롭습니다. 유비가 한중왕에 오르기 전, 황충은 정군산에서 하후연을 공격해 죽여버리는 어마어마한 공을 세웁니다. 하후연은 조조의 서쪽 방면 총사령관이나 다름없는 존재였습니다. 황충은 그런 그를 공격해 박살냈을뿐더러 목숨까지 빼앗았지요. 유비는 신상필벌이 확실한 군주였습니다. 공을 세웠으면 반드시 포상했습니다. 능력이 있으면 중히 썼고요. 그 결과 황충은 관우나 장비와 같은 반열에 오릅니다. 유비는 한중왕이 된 후에도 전좌우후 사방장군에 각각 관우, 마초, 장비, 황충을 임명합니다. 네 명을 동급으로 쳤다는 뜻이죠. 그 사실에 관우가 토라지다 못해 삐치는 일이 발생하지만 그건 나중 이야기고...... 그만큼 황충의 승진 속도는 대단했습니다. 


   이후 진원장군 뇌공이 나옵니다. 넵. 갑툭튀도 이 정도면 수준급입니다. 하지만 계한보신찬을 보면 나름대로 유명한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영릉 출신으로 유명한 호족이었다고 하며, 유비가 한중왕이 된 이후에 태상(太常)으로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태상은 제사를 맡은 직책인데 고위직이지만 실권은 적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튼 높은 대우를 받았단 뜻이죠. 


   그 다음에 법정이 나옵니다. 유비의 입촉에 있어 일등공신이었고, 그가 죽었을 때 유비가 눈물을 흘리며 애도했을뿐더러 시호까지 내렸지요. 당연히 고위직을 역임했으며 유비의 한중왕 등극 후에는 상서령(尙書令)이 됩니다. 상서령은 조금 전 이야기한 태상과는 달리 실권이 어마어마한 직책입니다. 내정을 담당하는 상서(尙書)의 총괄자 역할이거든요. 게다가 그 전에는 촉군태수를 역임했는데 촉군은 익주의 수도인 성도가 속한 군이었습니다. 이래저래 요직만 맡았던 셈입니다. 


   그리고 이엄입니다. 조금 신기한 것이, 이엄은 원래 형주 출신입니다. 그러다 유표가 멸망하자 익주로 가서 벼슬을 얻는데 그게 성도의 현령입니다. 그리고 유비가 익주를 차지할 때 다시 유비에게 항복하지요. 주인을 여러 번 바꾸면서도 항상 능력을 인정받았고, 급기야 조운이나 진도 같은 오래된 신하들도 이름을 올리지 못한 한중왕표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습니다. 게다가 이엄은 외지 출신이기에 가문빨과는 전혀 무관했죠. 이로 보아 이엄 역시 유비에게 제대로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유추해볼 수 있습니다. 훗날 이엄은 유비의 탁고를 받는 신하가 됩니다. 그 말년만 좀 더 좋았더라면....... 하.


  좋아요. 여기까지가 당시 유비의 부하들의 순위라도 보아도 크게 어긋남이 없을 겁니다. 단 한 사람만을 제외하면요. 


  미축이 왜 없을까요?


  안한장군(安漢將軍) 미축은 유비 일생일대의 은인이었습니다. 조조가 내린 태수 자리를 걷어차고는 거지나 다름없는 유비를 선택했죠. 엄청난 재산을 죄다 유비에게 밀어 넣었고 심지어 자신의 여동생까지 부인으로 들였습니다. 유비가 길거리에서 객사하는 대신 사병들을 이끌고 다니며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던 건 오직 미축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비는 입촉 후 그를 안한장군으로 삼고 그 지위를 군사장군 제갈량보다 위에 있게 함으로써 그 고마움에 보답합니다. 


  그런데 한중왕표에는 미축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군사장군 앞에 나와야 할 텐데 왜일까요. 영혼의 동반자 손건이나 간옹처럼 일찍 죽은 것도 아닙니다. 미축은 이 때 쌩쌩히 살아 있었거든요. 심지어 몇 년 후 유비가 황제에 오르라는 표를 올릴 때도 이름이 떡하니 등장합니다. 허정 다음에, 제갈량 앞에요. 미축의 이름이 한중왕표에 등장하지 않는 것이 저의 가장 큰 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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