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과 나 자신의 이야기 13
나는 에세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원래부터가 그랬다. 내가 읽는 책은 대체로 소설이었고 수필에는 흥미가 없었다. 에세이 계열의 글을 읽을 때마다 나는 타인으로부터 감정을 강요받는다는 느낌이 들어 영 마뜩찮았다. 남의 감정에 딱히 공감할 생각도 없었고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내 책장에는 하루키가 내놓은 모든 소설들이 일렬로 꽂혀 있지만 에세이는 단 한 권도 없다. 소설가 하루키가 그려낸 소설 속 세상은 눈부실 정도로 흥미로웠지만 그가 실생활 속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에 대해서는 나는 일말의 관심조차 없었다. 나는 에세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에세이를 쓰겠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나의 우울증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생각했다. 글을 통해 감정을 '표현'하지 않겠다고. 그저 감정을 '서술'하는 데 집중하겠노라고. 그게 내가 나 자신에 대한 글을 쓰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쓴 글이 우연히 관심을 받게 되었고, 엮어낸 브런치북이 한동안 인기 순위에 자리잡았으며, 내 브런치스토리의 조회수는 급등했고, 나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홀로 조용히 뿌듯해했다.
그러나 브런치스토리에서 내게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라는 꼬리표를 달아준 건 꽤나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역설적인 일이라고 해도 좋다. 여하튼 나는 에세이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나는 소설이나 삼국지 관련 글을 쓰는 걸 좋아하니까.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바라보는 나' 사이에는 언제나 간극이 있기 마련이고, 간혹 그 간격이 지나치게 넓어질 때면 그 결과가 우울증이라는 형태로 발현되기도 한다는 것을 지금의 나는 안다. 그렇기에 나는 지나치게 실망하거나 위축되지 않으려 한다.
셜록 홈즈를 창조해낸 아서 코난 도일 경은 홈즈가 지나치게 유명해진 나머지 자신이 쓴 다른 글이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에 불만이 많았다. 그래서 심지어 작품 속에서 홈즈를 죽이는 데에 이르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팬들이 지속적으로 홈즈의 부활을 요구하자 어머니에게 한탄 섞인 편지를 보내 자신의 심경을 고백하기도 했다. 그에 대한 어머니의 답신은 다음과 같았다고 전한다. 그래. 네 마음 이해한다. 그런데 아들아. 대체 홈즈는 왜 죽인 거니?
이 짤막한 일화가 바로 삶의 본질일지도 모르겠다, 고 나는 생각한다.
아마도 나는 앞으로도 에세이를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나 자신에 대한 글을 쓰게 될 것 같다. 왜냐면 글을 쓴다는 건 본질적으로 남의 관심을 얻기 위한 행위이고 나 또한 그것을 원하기 때문이다. 관종이라고 해도 좋다. 애당초 관종이 아니라면 일기장이 아닌 곳에 글을 쓸 이유가 없지 않는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