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직장 건물 뒤에 야트막한 동산이 있어 직원들은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산책을 하곤 한다. 하지만 오월도 끝날 무렵인 오늘은 마치 여름처럼 햇볕이 내려쬐는 바람에 산책로에 인적이 드물었다. 점점 더 늘어져 가는 아랫배를 근심하지 않았더라면 나도 사무실에 틀어박혀 조는 것을 택했을 것이다. 끈질기게 이어지는 오르막을 헐떡거리며 올라,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연신 훔치며 가까스로 평탄한 길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문득 올려다본 길가의 나무 위에서 귀여운 다람쥐 한 마리가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은 새까맣게 빛났고 양 뺨이 불룩했다. 청설모는 자주 보여도 다람쥐는 드문지라, 반가운 마음에 나는 아이처럼 손을 들어 다람쥐에게 흔들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본 다람쥐가 내게 마주 앞발을 흔들었다. 나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빤히 다람쥐를 올려다보았다. 나무에서 열 걸음쯤 떨어진 곳에서였다.
다람쥐가 내게 말을 걸었다.
“날씨가 꽤 더워졌네요. 금방 여름이 오겠습니다.”
“너, 지금 말했냐?”
다람쥐는 한쪽 앞발로 뺨을 긁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당연하죠. 저 아니면 여기 누가 있습니까.”
“하지만 너, 다람쥐잖아.”
“저도 압니다.”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람쥐는 픽 웃었다.
“이런 무더위에 산책하는 사람도 있는데 말하는 다람쥐가 뭐 그리 신기합니까? 그보다 더우니 여기 그늘로 오시죠.”
다람쥐가 손짓했다. 나는 잠시 망설였다. 너구리나 승냥이 정도만 되었어도 바로 뒤돌아 도망쳤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다람쥐는 말을 할 줄 안다는 것만 빼면 평범하기 그지없는 다람쥐였고, 적어도 나를 씹어 먹거나 할퀼 것 같지는 않았다. 난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나무 아래 그늘로 들어갔다. 잠시 시원함을 즐기는 사이에, 다람쥐가 나무 둥치를 타고 쪼르르 내려오더니 아래쪽 가지로 옮겨 앉았다. 그러고는 조막만한 앞발을 입 안에 넣어 뭔가를 꺼냈다. 도토리였다.
“하나 드시겠습니까? 좀 떫긴 하지만 맛이 괜찮습니다.”
“어, 음, 아니, 괜찮아.”
다람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도토리를 도로 입에 집어넣었다. 다시 뺨이 불룩해졌다.
“요즘 회사 다니는 건 좀 어떠십니까?”
마치 지하철에서 철 지난 자기계발서를 쌓아 놓고 파는 잡상인 같은 말투였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호기심이 동하기도 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라도 된 것 같은 기분으로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죽을 지경이지 뭐. 위에서는 만날 쪼아대고, 밑에서는 치고 올라오느라 난리고.”
다람쥐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고생이시겠군요.”
“뭐, 나만 그러는 건 아니니까. 다들 죽지 못해 다니는 거지 뭐.”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말끝에 절로 한숨이 묻어나왔다. 다람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씩 웃더니 다시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이직할 생각 없으십니까?”
무슨 개소리, 아니, 무슨 다람쥐 소리냐는 눈으로 나는 다람쥐를 쳐다보았다. 다람쥐는 양 앞발을 벌려 보였다.
“말하자면 스카우트 제안을 드리는 겁니다.”
문득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코웃음을 쳤다.
“하, 내가 갈 만한 좋은 직장이라도 있어? 뭐 도토리 농장 같은 덴가?”
“비슷합니다.”
다람쥐는 뜻밖에도 고개를 끄덕이더니 은근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다람쥐가 되고 싶은 생각 없으십니까?”
“사람이 어떻게 다람쥐가 되냐?”
“말하는 다람쥐도 있는 마당에 사람이 다람쥐로 변하면 안 된다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다람쥐의 지적에 나는 다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다람쥐는 앞발로 자기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실은 작년 이맘때만 해도 저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말을 할 수 있는 거지요.”
불현듯 내 표정이 어떤지 매우 궁금했다. 거울이 있으면 좋을 텐데. 하지만 다람쥐가 킥킥대는 모습을 보니 내 얼굴이 어떨지는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다람쥐는 웃음을 멈추더니 정중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 이거 실례했습니다. 아무튼 제 말은 사실입니다. 다람쥐가 된 지는 일 년쯤 되었습니다. 이 나무 아래쪽에 버섯 보이십니까?”
나는 나무 밑동을 내려다보았다. 보랏빛과 푸른빛이 섞인 것 같은 기묘한 색의 버섯이 뿌리 근처에 나 있었다.
“그걸 먹으면 다람쥐가 됩니다. 간단하죠?”
“이걸 먹으라고?”
“다람쥐가 되고 싶은 생각이 있다면 말씀입니다.”
나는 침묵했다. 다람쥐는 앞발로 콧잔등을 두어 번 문질렀다.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만, 한때는 저도 나름대로 잘 나가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업이라는 게 망하는 건 순식간이더군요. 혹시 이런 회사 이름 들어보셨습니까?”
다람쥐는 회사 이름을 말해주었다. 어렴풋하게 뉴스에서 본 기억이 나서, 나는 스마트폰을 꺼내 검색을 해 보았다. 내 기억이 맞았다. 건실한 중소기업이었지만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대하다 너무 무리한 나머지 부도가 난 회사였다. 가장 최근 기사는 작년 이맘때에 올라온 것이었는데 대표가 잠적했다는 것이었다. 찾았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 대표가 바로 접니다. 순식간에 회사가 무너지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사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냥 발길 닿는 데로 미친 사람처럼 헤매다 보니 여기였습니다. 어두운 밤이었고요. 보름달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는데, 그 때 문득 그 버섯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다람쥐는 앞발로 버섯을 가리켰다.
“색깔이 화려한 게 독버섯이 틀림없겠다 싶었지요. 어차피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도 없었기에, 홧김에 뜯어서 입에 털어 넣었습니다. 씹어서 꿀꺽 삼키고 나니 이제는 죽는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죽지 않더군요. 대신 이렇게 다람쥐가 되었습니다.”
다람쥐는 잠시 옛 기억을 더듬는 듯 말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이윽고 다시 입을 열었다.
“다람쥐로 살아보니 나쁘지 않았습니다. 도토리가 지천으로 널려 있다 보니 먹고 사는 데는 문제가 없고, 등산객들이 던져 주는 땅콩 따위만 모아도 겨울 한 철은 거뜬하게 납니다. 산은 작지만 다른 다람쥐나 청설모들도 그다지 많지 않은지라, 아직까지 구역다툼 따위로 골머리를 앓은 적도 없습니다. 다만 가끔 도둑고양이가 나타날 때는 저도 긴장이 됩니다. 하지만 고양이들은 대체로 여기보다는 아래 동네에서 사는 걸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 그쪽이 먹을 게 더 많아서 그렇겠지요. 그것만 빼면 다람쥐로 사는 건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굳이 선생님께 말을 건 겁니다.”
나는 다람쥐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다람쥐는 고개를 끄덕여 내 생각이 맞다는 걸 확인해 주었다.
“예. 아무래도 외로운 건 어쩔 수 없더군요. 다른 다람쥐들과는 그리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어디 땅콩이 있더라, 어디 도토리나무가 있더라, 그 정도죠. 한 달 내내 고작 다섯 마디도 하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비록 다람쥐가 되었지만 역시 사람이었던지라, 같이 말을 할 사람이 없다는 건 참 우울한 일이더군요. 그래서 얼마 전부터 다람쥐가 될 만한 분을 찾아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오늘 용기를 내서 말을 건 거지요.”
“왜 하필 나한테....... 아니, 왜 하필 저한테요?”
다람쥐는 다시 콧잔등을 만졌다.
“이런 말은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산책을 자주 하는 분들 중에서도 특히 근심이 많아 보였습니다. 그러니 혹시 고민을 훌훌 털어버리고 다람쥐가 되는 것을 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요.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개인적인 취향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묘사가 합당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람쥐는 얼굴을 붉혔다. 나는 방금 전에 찾아보았던 뉴스 기사를 떠올렸다. 그 기사에는 종적을 감춘 사장의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표현을 잠시 접어두고 굳이 덧붙이자면, 젊은 여사장이었다. 그래서 그 실종이 더욱 화젯거리가 되었던 것이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람쥐가 되어 산 속을 누비는 상상을 해 보았다. 잠에서 깨어나면 도토리를 먹고, 풀잎에 맺힌 이슬을 마시고, 나무를 오르내리고, 가지에서 가지로 건너뛰며, 뺨을 스쳐 지나가는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푸른 나뭇잎 사이에서 다른 다람쥐에게 몸을 기대고 있는 모습을 나는 그려보았다. 동시에 나는 나의 갑갑한 사무실과, 항상 눈을 치뜨고 나를 노려보는 상사와, 내 출신 학교를 은근히 거론하면서 나를 깔보는 듯한 동료와, 뒤에서 나에 대해 수군거리는 어린 직원들을 떠올렸다.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지만 나는 일순간, 진심으로 다람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는 눈을 뜨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해요. 하지만 안 되겠어요.”
“역시 그렇습니까.”
다람쥐는 실망한 듯 탐스러운 꼬리를 축 늘어뜨렸다.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멀리 어딘가에서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다람쥐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괜찮다면 왜 그런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스마트폰의 버튼을 눌렀다. 시계는 이미 점심시간이 한참 전에 끝났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하지만 뭐 어쩌란 말인가. 점심시간에 늦게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직원을 해고할 수는 없을 터였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쉬운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사진을 하나 찾은 후 다람쥐의 눈앞에 들어 보여주었다. 일순간 다람쥐는 미간을 좁히더니,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치 처음 만났을 때처럼 싱긋 웃었다.
“이거 실례했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사람을 잘못 골랐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제가 다른 사람들의 사정을 모두 알 수는 없으니까요.”
“물론 이해합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예. 조심해서 들어가시지요.”
나는 고개를 꾸벅 숙여보이고는 몸을 돌려 터벅터벅 아래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작은 동물이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다시금 길게 내뱉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싱긋 웃고 있는 여자아이의 사진이 떠 있었다. 아빠의 얼굴을 쳐다보며 환하게 웃고 있는 네 살배기 딸의 사진이.
며칠 후 사내에서 소문이 떠돌았다. 한 직원이 행방불명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가족들이 경찰에 신고했지만 경찰도 그를 찾지 못했다고 했다. 전혀 자취를 남기지 않고 그야말로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사족이 될 지도 모르겠지만 굳이 한 마디 덧붙이자면, 그는 젊은 남자였고, 미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