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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Oct 19. 2023

내일도 모레도 살아보겠습니다

나는 우울증에 걸린 공무원입니다 36

아침부터 비가 내렸습니다. 하늘은 무겁고 음울했습니다. 크게 틀어놓은 음악 소리는 차 안을 가득 채웠지만, 멜로디가 귓구멍 부근에서만 맴돌 뿐 머릿속까지 와 닿지 못했습니다. 마치 욕조 속에 잠기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수압이 온몸을 눌러왔습니다. 팔다리가 뻐근하고 가슴이 답답해져 심호흡을 몇 차례나 해야만 했습니다.   

   

몸 상태는 계속해서 좋았습니다. 안정제의 복용량을 점진적으로 줄여서 한창때의 1/4 수준까지 내려왔지만 아무 문제 없었습니다. 의사는 다음 달쯤이면 벤조디아제핀의 복용을 끊을 수 있겠다고 했습니다. 다만 항우울제인 에스시탈로프람의 복용량을 줄이는 건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문제이며, 제가 한때 워낙 상태가 안 좋았었기 때문에 섣부르게 양을 줄였다가는 자칫 과거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고 경계했습니다. 그래서 연 단위로 시간을 길게 가져가면서 주의 깊게 양을 줄여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심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싶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같은 날이면 의사의 판단이 옳다는 걸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불안하지만 않지만 무기력하고, 슬프지는 않지만 우울합니다. 몸은 사무실 의자에 앉아 있지만 마음은 바닥 어딘가에서 갈 곳을 잃은 채 헤맸습니다.     


버티기 벅차서 오후 반가를 냈습니다. 좋아하는 치킨을 먹고 한참 동안 소파에 누워 있자니 차츰 마음이 가라앉는 게 느껴집니다. 다시 밖으로 나와서 카페로 왔습니다. 항상 자리에 여유가 있어 선호하는 카페입니다. 밀크티 라떼를 주문하고 노트북을 켰습니다. 그리고 두서없이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습니다. 




휴식을 끝내고 복직한 지도 어느덧 백여 일이 흘렀습니다. 대체로 좋았고 가끔은 좋지 않았습니다. 일에 있어서는 두어달 가량 빡시게 몸을 갈아넣었고, 두 차례 크게 빡쳤으며, 평판 저하를 감수하고까지 업무적으로 나댔고, 그 대가로 원하던 목표를 이루어냈습니다. 집에서는 아내와 한 차례 크게 싸우고 나서 이틀 후 화해했습니다. 아이는 언제나처럼 자주 예쁘고 때때로 얄밉습니다. 병원은 여전히 꼬박꼬박 다닙니다. 여전히 의사의 말도 잘 듣습니다. 게임을 열심히 하고 만화도 봅니다. 평균적으로 볼 때 나쁘지 않은 매일매일이 대체로 엇비슷하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단 한 차례, 저녁에 약 먹는 걸 깜빡 잊었던 적이 있습니다. 다음날 꽤나 불안해했지요. 하지만 그날 역시도 아무 일 없이 지나갔습니다. 약 한 번 먹지 않았다고 즉시 큰일이 날 정도로 상태가 형편없지는 않다는 의미일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마냥 양호한 것만도 아닙니다. 오늘만 봐도 그렇습니다. 고작해야 날이 흐리고 비가 온다는 따위의 이유만으로 일을 내평겨치고 휴가를 냈으니 말입니다. 


여하튼 그렇게 사는 동안 누군가가 제가 말했습니다. 여전하시네요. 또다른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좀 바뀌신 거 같기도 해요. 흐음. 누구 말이 맞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둘 다 맞을 수도 있지요. 어느 부분은 그대로일 테고 어느 부분은 바뀌지 않았겠습니까. 사람이라면 다들 그렇듯 말입니다. 다만 저는 그 변화의 계기가 훨씬  더 극적이었고, 오늘 같은 날마다 그 여파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음을 느낍니다.


그래도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사람이란 때로는 즐거워하고 떄로는 우울해하는 법입니다. 우울증에 걸렸는지 여부 따위와는 관계없이 말입니다. 그저 예전보다 약간 더 많이 우울할 뿐, 지금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최근 우연히 인디밴드 몇 팀의 공연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디오스 오디오.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겨우 이름 정도만 들어봤을 뿐 실제 공연을 본 건 처음었습니다. 그런데 참 좋더군요. 덕분에 요 일주일 동안 두 밴드의 노래만 줄창 듣고 있을 정도입니다. 사십 년이 넘도록 살아왔음에도, 이렇듯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게 될 때마다 저는 여전히 기쁨과 즐거움을 느낍니다. 이게 살아 있다는 증거라고 말한다면 너무 거창한 이야기일까요? 


여하튼 이런 행복이 앞으로도 무수히 계속되기를 바라면서 내일도 모레도 한 번 살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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