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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Sep 08. 2023

제가 워커홀릭인 줄은 몰랐는데요

나는 우울증에 걸린 공무원입니다 33

언젠가 제 부서에 소속된 직원분께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꼼꼼하지 못한 편이라 중요한 일정도 간혹 잊어버리곤 하니까 옆에서 잘 챙겨주셨으면 좋겠다고 말입니다. 그분이 뜻밖에도 당황스러운 표정을 하더군요. 왜 그러시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의외였습니다. 


"스스로 꼼꼼하지 않다고 하셔서요. 제가 듣던 과장님은 그런 이미지가 아니었는데요."


눈을 서너 번쯤 깜빡일 시간이 흐른 후 제가 물었습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제 이미지가 어떤데요?"


응답은 즉각적이었습니다. 


"엄청 꼼꼼한 워커홀릭이요."




저는 저 자신이 워커홀릭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지금 일하고 있는 기관으로 소속을 옮겨온 것도 퇴근을 빨리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전에 있었던 곳에서는 대체로 주 6일을 일했고 여섯 시 반쯤에 집을 나서서 열한 시가 넘어 돌아오는 게 일상이었거든요. 공무원의 세계를 잘 모르시는 분들에게는 놀라운 이야기겠지만 그런 곳이 꽤 많습니다.  


그래서 지금 있는 곳으로 옮겨온 후 저는 꽤 만족했습니다. 집에 일찍 갈 수 있으니까요. 심지어 나름대로 중요한 자리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정말로' 빡시게 일하면 대부분의 경우 정시 퇴근이 가능했고, 야근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자주 있는 일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지만 그건 육체가 아니라 정신적인 영역이니까요. 이전에 있던 곳이라 해서 스트레스가 없는 것도 아니었고 말입니다. 


여하튼 제가 일하는 성향은 '내일 보고하는 90점짜리 문서보다는 오늘 보고하는 80점짜리가 낫다'였고, 굳이 하나 더 추가하자면 '세상에 100점짜리 보고서 따윈 없다'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체로 일을 빠르게 처리하는 편이긴 했지만 절대 꼼꼼하지는 않았고, 실제로도 제가 꼼꼼하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워커홀릭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없습니다. 애당초 퇴근을 빨리 하겠다는 이유로 인사교류를 신청한 사람이 워커홀릭일 리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남들은 그렇게 보지 않았더란 말입니다.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아서 몇몇 직원을 따로 불러서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평소 듣던 제 이미지가 어떠했느냐고 말입니다. 희한하게도 다들 비슷한 대답이었습니다. 워커홀릭. 꼼꼼. 열심. 일벌레. 기타 등등 비슷한 단어들. 너무나 뜻밖이었습니다. 제가 스스로 생각하는 저 자신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으니까요. 


제가 생각하는 저는 본질적으로 게을러빠진 사람입니다. 직장인이라면 대부분 그렇겠지만 농땡이 치는 걸 좋아하고 일하는 건 싫어하지요. 취미가 많아서 여러 가지에 관심을 기울이지만, 대부분의 경우 업무나 사회 생활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쪽입니다. 게다가 그 분야에서도 남들보다 뚜렷하게 앞서지는 못하고 말 그대로 취미생활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업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정도 작업해서 적당히 마음에 드는 수준까지만 해 놓고 넘어가기 일쑤였거든요. 


그리고 진짜 제대로 된 워커홀릭을 상사로 모신 적도 있습니다. 일 년에 설날과 추석을 제외한 363일을 출근한다는 소문이 파다한 사람이었죠. 그 사람은 타고난 머리도 천재적이었던 데다 어마어마하게 열심히 일했고, 그 결과 일반 공무원으로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에까지 도달했습니다. 그런 사람에 비하면 저 따위가 워커홀릭이라는 말을 듣는 건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어째서 제가 워커홀릭이라는 소문이 떠돌게 된 것인지, 저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습니다. 우울증으로 두 달 간 병가를 냈다가 복귀한 후, 저는 일하는 방식을 어느 정도 바꾸었습니다. 이제는 제가 모든 걸 직접 챙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신 제 밑에 있는 팀장과 직원들에게 맡기려고 합니다. 좋게 말하자면 권한의 위임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일을 미루는 것이겠지요. 어쨌거나 저는 세세한 지시를 내리기보다는 방향을 제시하는 일에 좀 더 집중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보고도 어지간하면 팀장들에게 맡깁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과거의 저는 모든 것에 직접 손을 대어야만 직성이 풀렸다는 이야기지요. 사소한 일들까지도 제가 직접 챙기지 않으면 불안했고, 그래서 제 깜냥이 미치지 못할 정도로 많은 것들을 어떻게든 제어하려 들었지요. 아마 그래서 남들이 저를 워커홀릭으로 보았을 겁니다. 별로 좋은 이야기는 아니군요. 


그래서 지금의 저는 워커홀릭이 아닌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여전히 일하는 걸 좋아하지 않고 농땡이 피우는 걸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최근에 내년도 업무 계획을 수립하면서 직원들에게 보고를 듣다 보니 난생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더란 말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재미있다'고 말입니다. 


정말이지 일이 재미있다고 느낀 건 처음이었습니다. 우울증에 걸린 후에야 이런 경험을 했다는 건 참 역설적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마도 제게 있어 나쁜 일은 아닐 겁니다. 일에서 고통을 느끼는 것보다야 재미를 느끼는 게 정신건강에는 훨씬 더 좋을 테니 말입니다. 물론 그만큼 제 부서 직원들은 힘들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과장은 진짜로 워커홀릭이었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도망치려 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어쨌거나 오늘의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몰랐는데 내가 어쩌면 워커홀릭일 가능성도 있겠구나'라고요. 물론 여전히 아닐 가능성이 더 높다고는 생각합니다만,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제가 생각하는 저와 실제의 저 사이의 괴리에서 몸부림치는 것보다는 차라리 가능성을 인정하는 게 훨씬 더 나을 겁니다. 그게 건강에도 더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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