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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곰 Dec 16. 2019

[촉한사영] 제갈량과 후계자들 (5)

더 깊게 들여다보는 삼국지

  244년 3월. 위나라의 대장군 조상은 촉한 정벌을 개시합니다. 이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지극히 정치적인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랬기에 더더욱 승리가 절실했던 조상은 필승을 위한 화려한 진용을 구축합니다. 대장군인 조상 자신이 정서장군 하후현과 옹주자사 곽회 등을 지휘하여 직접 한중을 공격한다는 계획을 수립한 겁니다. 이때 위나라가 동원한 대군은 무려 10만에 달했습니다. 반면 장완의 병력이 부현으로 빠져나가면서 한중에 남아 있는 병력은 불과 3만에 불과했지요. 


  위나라가 대군으로 공격해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중의 여러 장수들은 후방으로 후퇴하여 요새에 의지해 적을 막으면서 부현의 구원군을 기다리자는 의견을 개진했습니다. 일견 타당해 보이는 방책이었지요. 그러나 한중 방위의 총책임자였던 진북대장군(鎭北大將軍) 왕평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성은 지킬 수 있을지 모르나 적이 제멋대로 활개 치고 다니면서 한중의 백성들을 쓸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신 왕평은 적을 맞이해 싸우기 위해 오히려 진군하자는 과격한 주장을 내놓습니다. 


  대부분의 장수들이 반대했지만 오직 좌호군(左護軍) 유민만이 그에게 찬동했습니다. 이 유민이라는 자는 바로 대사마 장완의 외가 쪽 사촌동생이었습니다. 왕평은 그에게 군사를 주고 먼저 나아가 흥세산을 점거하도록 합니다. 흥세산은 적의 본대가 내려오고 있는 당락도(혹은 낙곡도)의 출구에 위치한 요충지였습니다. 두 사람은 흥세산에다 백여 리에 걸쳐 깃발을 꽂아 병력이 많은 것처럼 허장성세를 한 후 적을 맞이해 싸울 준비를 했습니다. 


  곧 조상의 본대가 마침내 도달하자 양군은 격렬한 전투를 벌입니다. 왕평은 험준한 지형에 의지하여 많은 수의 적을 효과적으로 막아냈으며 때로는 야습을 가하여 허를 찌르기도 했습니다. 조상은 가열한 공격을 가했지만 왕평의 방어를 도저히 뚫어낼 수 없었습니다. 왕평의 계책이 맞아떨어진 겁니다.




  그러는 동안 후방에서도 놀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적이 공격해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유선은 대장군 비의에게 절을 내리고(假節) 군사를 지휘하여 한중을 구원하도록 했습니다. 이때 부대가 출정 준비를 모두 갖추었는데, 내민이라는 자가 찾아와서는 느닷없이 바둑이나 한 판 두자고 청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비의는 또 그걸 덥석 승낙했습니다.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동안 긴급한 상황을 알리는 문서가 빗발치듯 날아들었습니다. 그러나 비의는 침착하게 바둑을 두면서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 비의의 모습을 보며 감탄한 내민이 말했습니다. 

  “내 잠시 그대를 시험해 보았을 뿐입니다. 그대는 가히 믿을 만한 인물이니 분명 적을 무찌를 수 있겠습니다.”


  이윽고 비의는 군사들을 이끌고 한중으로 질풍처럼 진격해 갔습니다.  


  한편 위군 본대가 흥세산에서 발이 묶인 지 무려 두 달이 지났습니다. 그러는 동안 부현에서 촉한의 구원병이 도착했을 뿐만 아니라 비의가 이끄는 대군마저 한중에 도달했지요. 반면 위군의 상황은 무척 좋지 않았습니다. 이민족과 관중의 백성들을 대거 동원하여 험준한 길을 통해 가까스로 보급을 받고 있었지만, 그 어려움을 견디지 못한 소와 말들이 죽어나가면서 마침내 보급이 끊어질 위기에 처한 겁니다. 결국 조상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비의는 조상이 무사히 돌아가도록 놓아두지 않았습니다. 조상의 움직임을 감지한 비의는 먼저 나아가 조상의 퇴로를 차단한 후 맹공을 퍼붓습니다. 조상은 악전고투를 벌인 끝에 간신히 후퇴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무수한 병사들이 죽었습니다. 촉한의 대승으로 끝난 이 전투가 흔히 낙곡대전으로 알려져 있는 흥세 전투입니다. 훗날 벌어진 강유의 적도 전투와 함께 제갈량 사후에 촉한이 쟁취한 양대 전과라 할 만하지요. 




  대승을 거둔 비의는 공로를 인정받아 성향후(成鄕侯)에 봉해집니다. 게다가 장완이 재삼 주청하여 마침내 익주자사(益州刺史)까지 넘겨받게 되지요. 이로서 비의의 명망과 지위는 장완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습니다. 장완이 와병 중이라는 점을 감안하자면 실권을 넘겨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곧 그만큼 업무 부담이 늘어난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비의의 승진으로 인해 비워져 있던 상서령(尙書令)에 동윤이 임명됩니다. 대장군 비의를 보좌하여 국정을 돌보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상서령이 된 동윤은 처음에는 전임자 비의의 업무 처리 방식을 본받으려 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불과 열흘 사이에 일이 밀리면서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게 아니겠습니까. 결국 동윤은 이렇게 탄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의 능력이 이토록 차이 날 수 있단 말인가! 과연 내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나는 온종일 일만 한다 해도 전혀 여유가 없겠구나.”


  한편 흥세 전투에서 위나라의 병력이 크게 손실되었으니만큼 이때가 어쩌면 북벌을 감행할 절호의 기회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촉한은 그 이후로 오히려 한동안 침묵을 지켰습니다. 그 이유는 명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장완과는 달리 북벌에 다소 부정적이었던 비의의 성향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동맹국인 오나라의 소란 때문이라는 해석이 제게는 좀 더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당시 오나라는 이른바 이궁의 변에 휩싸여서, 후계자 자리를 놓고 손권의 두 아들인 손화와 손패를 주축으로 나라 전체가 절반으로 갈라져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었거든요. 심지어 이듬해는 245년에는 손권에게 미움을 산 승상 육손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하였고 또 마무라는 자가 손권을 암살하려다 발각되는 등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도저히 촉한과 손잡고 위나라를 공격할 만한 상황이 되지 못했지요. 


  그러는 동안 또다시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그리고 246년에 이르러 촉한에 몹시 불행한 일이 닥쳐옵니다. 오랜 시일 동안 병에 시달려 왔던 대사마 장완이 마침내 눈을 감은 겁니다. 뿐만 아니라 상서령 동윤도 비슷한 시기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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