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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딘디버그 Jul 08. 2016

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이 아닌 내 여행에 대하여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 한참 방학을 앞두고 흔히들 읽는 ‘여행서’라고 생각한 나는 그의 깊은 사색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여행의 기술은 소크라테스가 그렇게 주장했던 ‘너 자신을 알라’와 같은 맥락이 아닌가 싶었다. 올 초 작고하신 신영복 선생님도 여행에 대해서 말씀하신 적이 있으셨다. 그는 여행 중 ‘가장 어려운 여행’을 굳이 꼽아서 이야기했는데, ‘머리에서 발까지 가는 여행’이라고 하셨다. 머리는 지식이요, 가슴은 열정이요, 발은 행동이다. 이 안에 표면적 의미는 아는 것이 마음으로 가서 행동으로 옮겨지는 과정이 너무 어렵다는 것이지만, 그 내면적 의미는 결국 ‘나 자신을 통찰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측면에서 내 여행기를 짧게 써볼까 한다.


 이 여행의 시작은 2014년 겨울이었다. 대학과 관련한 가정불화로 상담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던 나는, 그 해 겨울 수능을 막친 고3 학생들에게 꿈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들의 꿈은 ‘취업’이었다. 아직 어린 학생들이 자신의 꿈을 좇아가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 아닌가. 그런데도 그들에게 상식을 말한 나는 되려 비상식적인 사람이 됐다. “요새 꿈이 어딧냐”고 말이다. 무언가 잘못됐다고 느꼈다. ‘상식이 비상식이 되고, 비상식이 상식이 된 나라’ 드 보통의 책에서 훔볼트를 남아메리카로 가게 만들고 그를 남아메리카에 미치게 만들었던 호기심처럼, 이 제 그 명제는 내가 24살에 나이로 가진 늦깎이 호기심이었다. 그리고 내가 하던 모든 일을 내려놓았다. 상담 말이다. 뒤늦게 여행 갈 채비를 가주기 시작했지만, 무엇하나 가지고 있는 것이 없었다. 그렇게 1년 반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그럼에도 아직 갖춘 것은 많지 않았다. 부모님의 “그냥 회사나 들어가지? 힘들게 뭐하러 그걸 해”라는 조소가 들려왔다. 물론 조소는 아니다 그러나 이건 내게 조소였다. 


 나보다 먼저 여행 갈 채비를 한 사람은 수 없이 많다. 그중엔 제주도도 가기 벅차 하는 나와는 달리 저 미국, 유럽, 남미 등을 가고자 혹은 갈 여력이 있는 사람도 많다. 그럼에도 내가 아직 포기하고 있지 않은 이유는 ‘내가 갈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보통의 책에서 나오는 에드먼드 버크와 욥처럼 숭고함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저 우주에 떠 있는 별처럼 또는 산속에서 벌거벗은 육체미를 자랑하는 절벽. 반면 그것에 대비되는 인간의 나약함에서 나오는 숭고함. 그것을 통해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게 된다는 보통의 말처럼, 나 또한 ‘신’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느끼는 숭고함을 가지고 있어, 내 부족함을 너무나도 잘 알기에 이 여행을 포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이 여행의 목적은 무엇인가. 저서에서 존 러스킨은 ‘아름다움을 소유하는 방법’을 그림과 글쓰기(말로 그리는 그림)이라고 했다. 그런데 여기서 러스킨은 나와 다르다. 나는 아름다움을 소유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다. 나는 슬픔과 절망과 고통을 소유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 글을 쓴다. 그래서 내 목적이 무엇이냐고? ‘슬픔과 절망과 고통을 세상에 알리는 것’이다. 그래서 ‘비상식이 상식이 된 세상을, 상식이 상식’이 되게 하려고 한다.


 그래서 나보고 어디 여행 가려고 하느냐고? 이 여행의 목적지는 ‘기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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